조부모부터 3남 3녀로 왁자지껄한 대가족, 곯은 배를 칡으로 채우는 아이들, 코를 막고 내밀었던 채변봉투, 비 오는 밤을 틈타 스며드는 연탄가스, 대학생 한 명을 위해 희생하는 다른 형제자매…. 성석제(사진)가 2년 만에 펴낸 새 장편에는 일제강점기부터 2000년대까지 주인공 김만수 일가의 삼대를 둘러싼 시대상이 세밀하게 그려진다. 만수의 가족과 동료, 친구들이 잇달아 화자로 등장해 만수를 둘러싼 상황을 자신의 입장에서 진술한다.
만수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사상 문제로 고초를 겪고 세상에 등을 돌렸다. 만수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원망하며 농사꾼이 돼 가족을 부양한다. 화전민 출신 어머니와 누이들은 가족을 묵묵히 뒷바라지한다. 명석한 큰형은 서울 명문대에 진학해 가족의 기대를 한몸에 받지만 베트남전에서 고엽제 피해를 입고 숨진다. 영리하지만 악착같은 남동생 석수는 끝없이 만수를 무시하고 괴롭힌다.
가족이 상경해 변두리 단칸방에 살게 된 뒤 무기력해진 아버지는 술꾼으로 전락하고 만수가 가장 역할을 도맡는다. 전문학교를 다니면서 틈틈이 돈을 벌고, 교통경찰을 보조하는 전경으로 복무하면서는 소소한 뇌물을 챙기고, 훗날 공장 관리직으로 취직도 한다. 김만수 특유의 우직한 성실함으로 가족과 회사를 위해 답답할 정도로 희생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외면뿐이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듯 여기는 사람을 두고 ‘투명인간’이라고 부른다. 김만수는 압축성장 시대를 바보처럼 온 힘을 다해 살아가지만 결국은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투명인간이다. 이 소설은 각박한 세상을 힘껏 달려왔으나 소외된 우리 시대의 가장들을 기리는 서글픈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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