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의 삶은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가 사뭇 달랐다. 1930년대 태어난 세대는 격변의 시대를, 혹독한 현실을 온몸으로 돌파해야 했고, 386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과하면서 중산층의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전의 첫머리는 두 세대가 공유하는 집단적 특징을 개인의 서사에 초점을 두고 펼쳐낸다. 1933년생 서울 토박이였던 실존인물과 1960년대생 농촌 출신 가상인물을 앞세워 그들이 성장기에 읽고 접했을 법한 이미지와 책을 제시한 ‘모더니티의 평행우주’ 섹션이다. 이어 2층에 자리한 ‘인간의 생산’ 섹션은 근현대 우리의 교육이 어떤 인간과 사회를 지향했는지를 되돌아보고, ‘이상한 거울들’ 섹션은 과거의 자료를 사운드 영상 설치물 형태로 재해석했다. 》
전시에선 작품 대신 책 신문 잡지 도표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서울 중앙고 100주년을 기념해 2008년 개관한 인문학박물관을 테마로 한 아카이브 전시라서 그렇다. 20세기 한국을 돌아보는 책과 자료 등 방대한 소장품을 구축한 박물관은 지난해 고려대박물관으로 이관이 결정되면서 문을 닫았다. 그 이동 과정에서 시각문화연구자 박해천, 번역가 윤원희, 독립큐레이터 현시원 씨가 7개월간 소장품 5만여 점을 훑어보고 500여 점을 선별했다. 일민미술관과 세 기획자의 협업을 통해 전시, 단행본(‘휴먼스케일’), 강연과 교육 프로그램이 복합된 프로젝트가 탄생한 것이다.
가까운 과거의 낯선 얼굴에서 오늘의 우리 모습을 재발견하게 된다. 박물관을 미술관으로 불러온 발상의 새로움, 자료 중심 전시를 지루하지 않게 풀어낸 세 기획자의 공력이 돋보인다. 9월 21일까지. 02-2020-2050
○ 책으로… 옛 교과서-잡지의 추억
김태령 미술관장은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교차하는 사고 체계에 대한 호기심을 출발점으로 삼아 현재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가치관들이 언제 어느 지점에서 시작된 것인지 살펴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20세기 한국 사회의 여정을 시청각 자료를 통해 되짚는 전시에선 책이 중심을 이룬다. 일제강점기에 나온 국민학교 교과서, 미 군정청 시절에 나온 ‘초등공민’, 김세중 김남조 부부 등 유명인사 가정을 소개한 ‘여원’ 잡지, 386세대의 정신적 자양분이 된 사회서적과 교양서적 등 다양하다.
여기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연두교서부터 ‘한국소설의 가능성’에 대한 평론가 김현의 글까지 1960∼80년대의 풍경을 20개의 짧은 텍스트로 소개한 코너도 있다. 박물관에서 미술관으로 옮겨온 유물이 우리가 거쳐 온 ‘책의 시대’를 돌아보게 한다.
○ 이야기로… 광고-녹음물에 얽힌 사연
책과 더불어 이미지와 소리를 통해서도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1934년 동아일보 부록으로 발행된 세계지도, 금성사 가전제품 광고, ‘한열이를 살려내라!’ 판화 등 눈길 끄는 이미지가 많다. ‘열다섯 개의 목소리’ 코너에선 백남준, 최초의 트랜스젠더, 사채업계의 큰손 등 15명의 인터뷰를 녹음해 들려준다. 잊혀진 개인의 사연을 담은 ‘네 사람의 목소리’와 합창으로 들려주는 ‘저축의 노래’ ‘새마을노래’ 등에도 귀를 기울일 만하다. 기존 자료를 재배치해 근현대사를 재조명한 이번 전시는 과거를 되짚으며 인문학박물관이 탐색했던 명제를 다시 호명한다. ‘사람의 마지막 연구는 사람이다.’(1914년 ‘청춘’ 제1호)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