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英祖의 ‘청계천 준설 프로젝트’ 성공 비결은 기다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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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들이 청계천 주변 몰려들며… 쓰레기가 하천 막아 많은 문제 발생
물길 통하게 해야 해결되는데… 인근 주민들만으로는 공사 역부족
무리한 공사 대신 여론몰이 나서, 4년 꾹 참고 설득…공감대 확산

18세기 조선의 한양에서는 인구 집중으로 심각한 도시 문제가 발생했다. 빈민들이 청계천 주변으로 대거 몰려들면서 하천의 면적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들이 버리는 각종 쓰레기가 하천을 막으면서 홍수가 나고 전염병도 창궐했다. 해결책은 청계천을 파내 물길을 통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당시 조선은 이런 대공사를 할 만한 재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조선의 관행은 ‘내 집 앞의 눈은 내가 치워야 한다’였다. 즉, 국가 예산으로 도로나 다리, 성을 보수한 게 아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의 부역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이 원칙대로라면 청계천을 파내는 것은 인근에 사는 주민들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청계천이 너무 심하게 막혀 주변 사람들만으로는 준설공사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양 주민 모두를 동원하면 반발이 클 게 뻔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영조는 무리하게 공사를 밀어붙이는 대신 여론몰이에 나섰다.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 청계천 문제를 가지고 공청회를 열었고, 과거시험에서 ‘청계천 공사의 장단점을 논술하시오’라는 문제를 내 1등에게 바로 관직을 내리는 특혜도 줬다. 이 외에도 영조는 청계천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만나 대화를 하고 설득하는 작업을 3, 4년간 지속했다. 한 번은 광통교에 나가 “나는 그대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보니 다리가 심하게 막혀 치워내고 싶은데, 괜찮겠는가?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라고 운을 뗐다. 그러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모두 우리를 위한 일인데 누가 싫어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조선시대에 이렇게 직접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왕은 영조가 처음이었다.

마침내 1760년 2월 18일에 대망의 청계천 공사가 시작됐다. 이날도 영조는 현장에 나와 직접 첫 삽을 떴다. 요즘엔 이런 세리머니가 흔하지만 조선에선 역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말에 공사를 시작하는 것을 ‘첫 삽을 뜬다’라고 표현하는데, 이 말과 착공식에서 첫 삽을 뜨는 행사가 영조의 청계천 공사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다. 영조는 이후 공사현장을 주민들에게 공개했다. 사실 공사현장을 공개하면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조에게는 청계천 공사의 필요성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자신도 직접 현장에 나가 백성들과 섞여 앉아 공사를 관람했다.

결국 청계천 공사는 대성공으로 끝났다. 동원한 사람을 제외하고 자원자만 한양 전 지역에서 7000∼8000명이 몰려들었다. 나중에는 경기도 사람과 제주도의 공인들까지 자원해 모두 1만 명에 육박했다.

청계천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 영조는 “마음 같아서는 공사를 밀어붙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만큼 영조는 공사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확신했다. 그러나 영조는 공감대가 확산될 때까지 무려 4년을 꾹 참고 기다렸다. 프로젝트는 성공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고, 가장 큰 성공은 모두가 그 이익을 공감하고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성공이 그 프로젝트 하나만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프로젝트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영조는 노년에 “나의 가장 성공적인 업적이 청계천 정비사업”이라고 회고했다. 이 말은 결코 청계천의 물길을 뚫었다는 토목공사 하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노혜경 덕성여대 연구교수
#영조#청게천#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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