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나를 찾아서]조선시대 행정달인의 청빈한 삶 생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21일 03시 00분


오리 이원익 관감당

“내가 죽거든 절대 후하게 장사지내지 마라.”

오리 이원익이 말년을 보낸 관감당.
오리 이원익이 말년을 보낸 관감당.
조선의 청백리 재상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1547∼1634) 선생의 유언이다. 오리 선생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6번씩이나 지냈다. 그런데도 비바람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는 두 칸 초가집에 살았다. 보다 못한 인조 임금이 그에게 집을 하사했다. 그럼에도 그는 세 번이나 이를 거절했다. 인조가 “내가 집을 하사하는 것은 백성들이 그대의 청백리적 삶의 자세를 보고 느끼게 하고자 함이다”라고 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것도 “그렇다면 5칸짜리 집을 지어주십시오”라는 조건이었다.

그것이 관감당(觀感堂)이다. 임금이 하사한 건물로는 유일하다. 관감(觀感)은 ‘보고(觀) 느끼라(感)’는 뜻. 1637년 병자호란 때 소실됐다가 1694년(숙종 20년)에 중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20세기 초에 새로 지어진 것. 오리(梧里)라는 호는 옛날 이 동네가 오동나무고을로 불렸던 데서 유래된 것.

오리 이원익은 대동법을 실시해 세금정책을 개혁하고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사후에는 종묘에 있는 인조의 묘정에 함께 배향된 첫 번째 신하였다. 그에 대해선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것처럼 가냘프나 관직을 맡으면 늠름하여 범하기 어렵다…”는 기록이 있다. 저서는 많이 남기지 않았지만 그 대신 나랏일에 온 힘을 쏟은 ‘행정달인’이었다.

충현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조선시대 종가박물관’이다. 13대 종손인 이승규 씨와 종부 함금자 씨 부부가 설립했다. 전시관인 충현관(忠賢館)과 야외 전시장으로 구성돼 있다. 이원익선생의 영정(影幀)과 친필, 교서, 문집과 후손들이 남긴 고문서 목가구 제기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경기 서남부 전통 종가의 모습이 오롯이 남아있다. 야외에는 관감당(觀感堂)과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오리영우(梧里影宇),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종택(宗宅)과 그의 부모인 함천군(咸川君)내외 묘소도 있다. 1993년 복원된 ‘바람으로 목욕한다는’ 풍욕대(風浴坮)와 삼상대(三相臺) 정자도 아늑하고 단아하다. 관감당 앞마당의 400세 측백나무가 꿋꿋하다. 02-898-0505

광명=손진호 전문기자 songb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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