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섭 전문기자의 바둑人]<16> 女 최초 500승 박지은, 승부사 기질은 어디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25일 17시 09분


박지은 9단은 여자최초로 500승을 달성한데 대해 “앞으로도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윤양섭기자 lailai@donga.com
박지은 9단은 여자최초로 500승을 달성한데 대해 “앞으로도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윤양섭기자 lailai@donga.com
예쁘장한 얼굴과 아담한 몸매, 그 어디에 독한 승부사 기질이 숨어있는 것일까. 여자 바둑의 역사를 개척해온 박지은 9단(31)을 보면서 늘 궁금했던 점이다.

여자 최초로 500승을 이뤄낸 박 9단을 22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연구실은 서울 마포구 연남동 연남파출소 옆 건물 4층이었다. "겉모습은 섬약하고 승부욕도 없어 보이는데…"라고 슬쩍 물어봤다.

"제가요, 어렸을 때부터 승부욕이 있었나 봐요. 바둑을 한창 배울 때인데 아버지한테 졌어요. 분해서 울었죠. 그런데 운다고 엄마에게 맞았어요(웃음)." 엄마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빠에게 지고 우는 딸이 괘씸했던 모양이다.

박지은은 늘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다녔다. 2001년에 여자 처음으로 100승 고지를 밟았고, 2003년엔 여자로는 처음으로 농심신라면배 대표에 선발됐다. 2008년에는 여자 최초로 입신(入神·9단의 별칭)에 올랐다. 세계여자대회에선 개인전에서 5차례 우승했고, 단체전에서는 맏언니로 7차례 우승을 이끌어 '월드 퀸'이라고 불렸다. 국내 기전에서도 여류명인전 여류국수전에서 우승한 바 있다.

박 9단은 500승 소감에 대해 "여자 첫 번째라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보고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고 싶다"면서도 "요즘 성적을 못내 주목을 받는 게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몸이 아픈데, 핑계 같아서…"라며 성적부진을 분해 하는 듯 보였다. 그에게는 2010년부터 시합 도중 몸에 열이 나고 숨 쉬는 게 괴로운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됐다고 한다. 요즘에는 평상시에도 가끔 그런 증세가 나타난다고. 병원에서도 특별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해 주로 한약으로 몸을 보하고 있다.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는 상황이라는 것.

"혹시 운동을 하지 않아 그런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어렸을 때 합기도도 배우는 등 운동을 좋아 한다"며 여러 가지 운동을 꼽았다. 스쿼시도 6개월 정도했고, 실내 암벽타기도 배웠다는 것. 최근에는 헬스장에서 7개월 정도 근육 운동을 했다고 한다. 요가를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다.

박 9단에게 바둑을 배운 뒤 가장 기뻤던 순간을 꼽아달라고 했다.

"입단할 때 정말 기뻤다(그는 중 2때 입단했다). 입단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때는 입단하면 모든 게 끝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한 관문을 통과한 것이란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모든 기사들이 그랬을 것이다. 2003년 세계대회인 정관장배에서 우승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대국을 꼽아달라고 하자 "바둑왕전에서 조훈현 9단을 이겼을 때"라는 대답이 먼저 나왔다. 2002년 도요타 덴소배에서 한국기사 킬러였던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을 이겼을 때, 호작배 결승 1국에서 반집을 져 결국 준우승에 머물렀을 때도 기억난다고 했다. 그러고는 타이젬이 주최한 루이나이웨이 9단과의 10번기 치수고치기를 꼽으며 "그 때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2008년 세계대회인 원양부동산배에서 루이 9단에게 2-1로 이겨 우승을 차지해 9단으로 특별승단한 때도 얘기했다.

박지은은 비교적 늦은 나이(10세)에 바둑을 시작했다. 1급 실력의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이어 서울 관악구 신도림동의 바둑교실에 3개월 정도 나갔다. 당시 박지은은 부천으로 이사를 가게 됐는데 학원 원장이 그의 부모에게 "소질이 있으니 계속 가르쳐보라"고 권했다. 부천에 가서도 바둑학원을 다녔다. 거기에는 바둑을 잘 두던 '오빠'가 있었는데 8점을 깔고 두기 시작해 1년 만에 이겼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바둑이 정말 재미있었을 때"라고 말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여자연구생제도가 없이 남녀를 같이 뽑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4,5,6조에서 맴돌며 정체기를 보냈다. 그러다 1조까지 치고 올라갔다. 각종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하고 양천바둑도장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둑 공부를 한 게 실력 향상의 요인이었다. 도장에는 프로 기사들이 사범으로 있었으며, 박영훈(현 9단), 이다혜(현 4단) 홍민표(현 8단) 등과 같이 배웠다.

박 9단은 "바둑을 두다 보면 막히는 때가 온다. 그래도 바둑을 계속 두고 공부가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는다. 바둑은 그런 식으로 계속 업그레이드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기풍에 대해 "어렸을 때는 무조건 힘 바둑을 좋아했다. 공격하고 잡으러 가는데서 희열을 느꼈다. 지금은 실리도 좋아하지만 두텁게 두려고 한다. 기풍은 계속 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지은 9단(왼쪽)이 동료들과 운영하는 홍대연구실에서 김동호 4단과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 윤양섭기자 lailai@donga.com
박지은 9단(왼쪽)이 동료들과 운영하는 홍대연구실에서 김동호 4단과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 윤양섭기자 lailai@donga.com
박 9단은 현재 4년째 동료 기사들과 홍대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연구실을 내게 된 것은 바둑 공부를 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 혼자 사무실 임대료를 내기가 벅차 박영훈 9단과 송태곤 9단 등에게 도움을 청했다. 흔쾌히 응했다. 처음에는 홍대 앞의 작은 연구실을 얻었으나 회원이 늘어나면서 연남파출소 옆으로 옮겼다. 현재 회원은 본인을 포함해 박영훈과 송태곤, 이희성 9단, 홍기표 6단, 최기훈·유재호 5단, 김동호·이호범 4단, 박지연·김미리 3단 등 11명. 본래는 14명이었으나 3명이 바둑상비군에 선발되면서 회원이 줄었다. 연구실에서는 월요일마다 신형 정석 등에 대해 연구모임을 갖고 주중에는 자체 리그전을 벌였다. 하지만 요즘은 시합이 많아 일시 중단하고 자유롭게 기보를 보며 공부를 하고 있다.

박 9단은 이영신 강승희 윤영민 프로와 친하게 지내왔으나 요즘은 자주 만나지 못한다고 한다. 부모님 집에서 나와 홍대 근처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음식은 잘 해먹느냐고 물었더니 "요리를 잘 못해 주로 사먹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중국에는 바둑대회 때문에 50,60번 정도 가봤다. 처음에는 중국 음식을 못 먹었는데 요즘은 잘 먹는다고.

당신에게 바둑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바둑 두는 게 좋았다. 내게는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올 초에는 몸이 하도 아파 휴직계를 낼 생각까지 했다. 속상했다. 요즘 바둑에 올 인을 하지 못하고 있다. 몸이 받쳐주질 않는다. 애증 관계라고나 할까. 하지만 앞으로도 열심히 하고 싶다."

윤양섭 전문기자laila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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