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강태선 블랙야크 회장의 ‘내 고향 탐라천국’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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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바람 같던 인생 전반전, 산처럼 살아갈 후반전

거무튀튀한 밭두렁과 푸른 하늘, 푸른 바다. 돌과 거센 바람 그리고 한라산. 어찌 꿈엔들 잊힐리야. 제주 새별오름(519m)에 선
 강태선 회장. 그 뒤로 올망졸망 오름들이 아슴아슴하다. 제주=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거무튀튀한 밭두렁과 푸른 하늘, 푸른 바다. 돌과 거센 바람 그리고 한라산. 어찌 꿈엔들 잊힐리야. 제주 새별오름(519m)에 선 강태선 회장. 그 뒤로 올망졸망 오름들이 아슴아슴하다. 제주=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65)은 ‘제주 섬 촌놈’이다. 그는 서귀포 한 귀퉁이 갯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지금의 중문해수욕장 부근이 바로 그곳이다. 그는 한여름 한라산 지하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천연수영장(논짓물)에서 천방지축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그러다가 목이 타면 어디서나 콸콸 솟는 용천수(대왕수, 소왕수)를 꿀꺽꿀꺽 마셔댔다. 꿀보다 달았다.

바닷가(갯깍)엔 ‘돌 병풍절벽’이 우렁우렁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고, 그 틈새엔 하얀 문주란꽃과 연보라 해국꽃이 방싯방싯 하늘거렸다. 밤에는 반딧불이 숯불싸라기처럼 날아다녔다. 강태선은 코흘리개 친구들과 갯깍의 동굴들을 들락거리며 숨바꼭질도 하고, 수정돌조각이 상아처럼 박혀있는 동굴천장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썰물 땐 자그마한 모래밭(조른모살)에 소를 끌고 갔다가, 밀물 때 혼자 슬쩍 빠져나와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았다. 소는 바닷물에 길이 사라져 썰물 때까진 그곳 주변의 풀을 뜯고 있어야 했다. 조른모살은 그만의 ‘천연목장’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내 초등학교 교훈이 ‘樂山樂水(요산요수)’겠는가. 현재 중문하얏트호텔 너머로 긴 모래밭(진모살)이 펼쳐지는데, 그곳이 바로 중문해수욕장이다. 난 그곳 초등학교를 마치고 왕복 이십 리 길의 중문중학교(남녀공학)에 들어갔다. 졸업생 39명 중 8명만이 중학교에 갔을 정도로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다. 비가 쏟아지면 예래천 물이 넘쳐 등굣길이 끊겼다. 어찌어찌 예래천을 건너더라도 천제연폭포 위쪽다리에 간당간당 물이 찰랑거려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하굣길 푹푹 찌는 찜통더위 때 첨벙 뛰어들어 달아오른 몸을 식히곤 했던 폭포였다. 그렇게 중학을 마치고 이번엔 한라산 너머 제주시의 오현고로 유학을 떠났다. 순전히 ‘자식교육’에 모든 걸 바쳤던 어머님 덕분이었다. 제주시에선 친구와 자취를 했는데, 배고플 때마다 함께 고구마 뼈따기(썰어 말린 것)를 삶아 먹었다. 하나 먹다가 둘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었다. 가끔씩 제주시에서 자취하던 여고생들이 놀러와 김치를 담가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내가 제법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은 ‘네가 키가 크고(175cm, 74kg) 얼굴도 흰데다, 붙임성이 좋아서 그랬다’고 말하지만, 과연 꼭 그것만일까. ㅎㅎㅎ”

1971년 강태선은 서울로 올라왔다. 대학은 집안형편상 어림도 없었다. 1968년 고교졸업 후, 잠시 제주 유지(油脂)공장 관리부에서 일했지만,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젊은 날을 마냥 이렇게 보낼쏜가. 뭔가 돌파구가 절실했다.

강태선은 서울 남대문시장 이모네 옷 도매상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하나씩 장사하는 법을 배웠다. 생산, 유통, 자금, 자재, 장부정리 등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다. 틈틈이 북한산에도 올랐다. 인수봉 백운대 노적봉 만경대…. 한라산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등산장비는 남대문시장의 미군군수물자를 이용했다. 하지만 도무지 몸에 맞는 게 없었다. 아예 원단을 사다가 직접 만들기로 했다. 시장엔 ‘노점 미싱(재봉틀)아주머니’가 흔했다. 그 아주머니들과 이 궁리 저 궁리하며 텐트, 침낭, 배낭 등을 만들었다. 재미가 쏠쏠했다. ‘강태선표 등산장비’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챙겨들고 정릉 청수장 코스로 북한산에 올랐다.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1973년 강태선은 종로5가에 등산장비전문점 ‘동진산악(후에 동진레저로 개명)’을 열었다. 공장 5평에 매장 5평. 처음으로 ‘자이언트’라는 브랜드의 배낭을 선보였다. 1977년엔 ‘프로자이언트’라는 상표로 텐트 배낭 침낭 신발을 내놓기 시작했다. 1982년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다. 갑자기 ‘무박산행’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거기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산악회가 기름을 부었다. 너도나도 등산화를 찾았다. 86아시아경기와 88서울올림픽 특수는 그 정점이었다. 바야흐로 아웃도어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다. 어느새 동진레저 주변은 전문등산장비 거리가 됐다. 다른 가게들이 하나둘씩 ‘동진 따라하기’를 했기 때문이다. 종로5가는 불암산, 북한산, 도봉산을 오가는 버스의 주요 길목이기도 했다. 1990년까지 동진레저 등산용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뭐든 잘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 1991년 산에서의 취사야영 전면금지령이 떨어졌다. 졸지에 등산용품업계의 70% 이상이 문을 닫았다. 나도 거의 망하다시피 했다. 그때 동진을 살린 건 현대자동차노조였다. 1993년 현대자동차는 야심작 쏘나타자동차를 내놓았다. 회사는 그 기념으로 전 사원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는데, 현대차노조는 침낭을 원했다. 사원들이 대부분 독신아파트 생활하는 총각들이라 이불빨래가 성가셨던 것이다. 문제는 수량이었다. 무려 3만2000개를 20일 안에 뚝딱 만들어내야 했다. 그건 대한민국 그 어느 업체도 불가능했다. 경쟁사들은 모두 입찰을 포기했다. 난 눈 딱 감고 달려들었다. 단 ‘선금 50%’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현대차의 담당과장이 ‘내 아파트 판 돈’이라며 선뜻 은행에서 돈을 찾아 건네줬다. 난 부리나케 회사직원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납품전쟁’에 들어갔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하마터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뻔했다. 당시 외국출장 중이었던 현대차 최고경영진이 사전보고를 받지 못했다며 ‘침낭 선물’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강태선은 앞이 캄캄했다. 울산을 오르내리며 현대차노조 설득에 매달렸다. 천만다행으로 젊은 노조원 중엔 산 마니아들이 많았다. 그런 노조원들의 도움으로 원만하게 노사합의가 이뤄졌다.

결국 회사는 노조에 격려금 명목으로 현금을 주고, 노조는 그 돈으로 침낭을 사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우선 아파트 판 돈을 내놓았던 현대과장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하늘이 도왔다.

현대는 IMF사태 때 또 한번 강태선을 구했다. 정주영 회장(1915∼2001)의 금강산관광(1998.11)으로 숨통이 터졌다. 자식 며느리들이 어르신들 금강산관광길에 꼬박꼬박 등산화와 등산복을 사드렸다. 블랙야크는 금강산을 오가는 봉래호, 금강호, 풍악호, 설봉호 네 유람선에 매장까지 냈다.

“난 일주일에 한 번꼴로 고향에 내려간다. 결혼식, 상가(喪家), 크고 작은 모임, 강연…. 언제나 가슴이 설레고 새롭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한라산이다. 난 그 품에서 컸다. 봄이면 방목했던 우리 소나 말을 찾으러 온 산을 며칠씩 헤매곤 했다. 오래 떨어져 있었지만 첫눈에 식구를 알아봤다. 소는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소를 보고 웃었다. 그때 내 근육이 쇠줄처럼 단단해졌다. 한 해 4개월을 외국에 머무르고, 하루 5시간밖에 잠을 못 자도 끄떡없다. 히말라야를 30여 번 갔던 것도, 해발 7000m의 2캠프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그 힘이다. 40대 후반에 늦깎이 대학공부 땐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었다. 솔직히 공부가 돈 버는 것보다 몇 배나 힘들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향 탐라의 억척스러운 기운’ 덕분이었다. 제주 촌놈이 작은 성공을 이뤘다. 하지만 이젠 세계로 뻗어야 한다. 물론 돈이 전부가 아니다. 베풀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봄이 오래 간다. 제주는 봄이 길다. 그게 한라산이 나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다.”  

▼ 신혼집 마련할 어음 50만원, 결혼 한달 앞두고 부도가… ▼

동대문시장 초짜 장사꾼


사글세 문간방에서 함께 사업을 시작한 강태선 회장 부부가 지리산 정상에 올랐다. 강태선 회장 제공
사글세 문간방에서 함께 사업을 시작한 강태선 회장 부부가 지리산 정상에 올랐다. 강태선 회장 제공
1975년 3월 16일. 강태선은 제주의 고향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당시 제주도청에 다니던 세 살 아래의 제주토박이 처자.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맞선을 본 뒤, 딱 세 번째 만나고 결혼을 결정했다. 첫 인상이 수더분하고 푸근했다.

문제는 결혼자금이었다. 어음 50만 원을 꼭꼭 챙겨뒀었는데, 그게 하필 결혼 한 달 전에 부도가 나버렸다. 졸지에 단칸방 얻을 돈도 없었다. 결혼식이고 뭐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미적거리다가 결혼식 하루 전에야 집에 내려갔다.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그저 벙어리 냉가슴이었다.

별 수 없었다. 처갓집 신행을 마친 뒤 부랴부랴 혼자 서울로 올라왔다. 신부에게는 ‘내가 먼저 서울에 올라가 정리한 뒤 부르겠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여기저기 돈을 구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사실 적수공권의 초짜 장사꾼 청년에게 누가 돈을 빌려 주겠는가.

“두 달쯤 됐을까. 결국 아내가 물어물어 동대문시장으로 날 찾아왔다. 당시 난 5평짜리 가게가 집이고 공장이고 매장이었다. 그곳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어찌어찌 동대문부근의 숭인동에 방을 얻었다. 하지만 그곳은 유흥업소 직업여성들이 많이 살았다. 아내가 놀라자빠졌다. 날마다 눈물바람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보다 못한 시장통 어르신 한 분이 날 불렀다. ‘쯧쯧, 강 군, 자네는 어찌 가게 일은 똑 부러지게 잘하면서, 제 앞가림은 그렇게 칠칠맞지 못한가. 자네 결혼식은 고향 제주에서 했잖은가. 그러니 이곳에서 피로연을 열게. 그때 나오는 축의금으로 방부터 얻게나.’ 귀가 번쩍 뜨였다. 당장 시장통의 설렁탕 집에 피로연 예약을 했다. 시장상인들이 앞다퉈 몰려와 축하해 줬다. 식대를 내고도 40만 원이 남았다. 동대문스케이트장 옆에 35만 원에 사글세 문간방(한 달 1만 원)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제주촌놈’ 강태선은 서울에 둥지를 트는 데 성공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첫째, 둘째 딸을 그곳에서 낳아 길렀다. 마침 주인할머니, 할아버지는 단둘이 살았다. 아이들을 끔찍이 예뻐했다. 엄동설한 추위에는 아이들 추울세라 솜이불로 바람막이를 해줬다. 강태선 부부를 친자식처럼 대했다. 바쁠 땐 강태선 아내가 가게에 나와 도울 수 있었던 것도 그분들이 아이들을 돌봐줬기에 가능했다. 후에 그분들은 이사 갈 때 강태선 가족도 함께 데리고 갈 정도였다. 요즘도 강태선 딸들은 그 할머니를 친할머니 이상으로 따른다. 할아버지는 먼저 세상을 뜨셨다.

“가난할 때 참으로 귀한 분들을 많이 만났다. 나로선 큰 복이었다. 그 후 마장동 공장으로 옮겨 살았다. 1, 2층이 공장이고 3층이 살림집이었는데, 공장직원이 50명이나 됐다. 공장관리가 골치 아팠다. 날이면 날마다 직원들끼리 싸웠다. 파출소 들락거리는 게 일상사였다. 한밤 전화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 그건 틀림없이 파출소의 ‘출두요구’였다. 아내는 전화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돈도 싫고, 모든 게 다 싫다’며 울었다. ‘제발 공장을 때려치우자’고 호소했다. 도리 없었다. 1983년 공장을 정리했다. 직원들에게 각각 3개로 나눠주었다. 난 일감을 주고 그분들은 생산을 해서 물건을 대도록 했다. 그렇게 30여 년을 형제처럼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그중 두 곳은 다른 사업으로 빠져나갔고, 지금은 한 곳만 남았다.”

강태선은 유복자다. 위로 누나가 하나다. 아버지가 1948년 제주도 4·3사건 희생자다. 또래 동창생들 중엔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의 중문중 동기생들 가운데 제주시로 고등학교 유학을 간 남학생은 5명이었다. 이 중 4명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왜 그런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강태선은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가 밭일을 하면, 밭두렁의 검은 돌을 장난감 삼아 혼자 놀았다. 집을 지었다가 허물고, 허물었다가 다시 새집을 짓곤 했다. 봄엔 거무튀튀한 돌담 사이로 청보리가 우우우 일어났다. 샛노란 유채꽃이 물감을 뿌린 듯 선명했다.

“4·3은 가능하면 잊으려고 노력한다. 두 번씩이나 가슴에 상처를 입기는 싫다. 제주에 내려갈 때마다 아버지 산소엔 꼭 찾아가지만, 그렇다고 자꾸 가슴에 담고 가면 좋을 게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다시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장사에도 철칙이 있다. 가족일수록 더욱 엄격해야 된다. 초창기 처남이 우리 회사에 있었는데, 어느 날 사고가 터졌다. 그때 난 눈 딱 감고 처남부터 잘랐다. 그런 다음에 다른 직원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그 뒤 한 3년 동안 처가에 가지 못했다. 그 뒤 그 처남이 잘돼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ㅎㅎ”  

▼강태선 약력

♣학력 ▽1949년 4월 25일(음력) 제주서귀포 중문 예래동 출생 ▽상예국민학교(15회·현 예래초등학교)∼중문중(15회·1965)∼오현고 졸업(16회·1968) ▽탐라대 경영학과 졸업(2007) ▽동국대 경영전문대 졸업(석사 2009) ▽고려대경영대학원 BMP수료(2004) ▽제주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2011) ▽환경재단 기후변화리더십과정 수료(2011) ▽서울대 국가정책과정 수료(2011) ▽제주대 명예경영학박사(2013)

♣산 경력 ▽거봉산악회창립(엄홍길 홍종철 홍영길 외 11인·1978) ▽몽블랑등정(1983) ▽초오유, 시샤팡마원정대 단장(1993) ▽안나푸르나, 칸첸중가 원정대장(1997) ▽세계7대륙최고봉 엘브루스원정대장(2000) ▽오은선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장(2009) ▽오은선 안나푸르나 원정대장(2010) ▽서울시산악연맹회장(1999∼2009)

♣포상 ▽대한민국체육훈장 백마장(2004) ▽자랑스런 서귀포인(2005) ▽서울시문화상 체육분야(2007) ▽서울산악봉사대상(2009) ▽제주도문화상(2012) ▽국민훈장모란장(2012)

♣저서 ▽정상은 내 가슴에(2009) ▽오늘도 도전이다(2012)

♠현재 ▽㈜블랙야크 회장 ▽㈜동진레저 회장 ▽북경블랙야크유한공사 대표이사 ▽제주대 겸임교수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 강남구협의회장 ▽한국스카우트연맹 부총재 ▽자연보호중앙회 명예총재 ▽한국마케팅학회 부회장 ▽기후변화센터 이사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블랙야크#강태선#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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