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섭 전문기자의 바둑人]<17>日유학 가자마자 프로3단, 日기사들 반발했지만…누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6일 13시 46분


김인 국수는 “바둑은 내게 있어 생활 그 자체”라고 말했다. 강진이 고향인 그는 월출산을 닮아 선이 굵은 바둑을 둬왔다. 한국기원 제공
김인 국수는 “바둑은 내게 있어 생활 그 자체”라고 말했다. 강진이 고향인 그는 월출산을 닮아 선이 굵은 바둑을 둬왔다. 한국기원 제공

김인(金寅) 9단(71)은 바둑도 중후하지만 삶과 언행에도 무게가 실려 있다. 선이 굵은 바둑을 둬왔고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예인(藝人)이기도 하다. '영원한 국수(國手)'로 불린다.

기자가 바둑 기사를 쓴지 4년째이지만 그를 인터뷰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가 승부의 세계에서 비켜있었고, 인터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8일부터 11일까지 국수들의 고향인 전남 강진과 영암, 신안에서 열리는 '국수산맥 국제바둑대회'의 대회장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기원에 인터뷰를 부탁했다. "인터뷰할 게 뭐 있다고…"라는 응답이 돌아와 "대회 성공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겨우 승낙을 받았다. 7월 29일 한국기원 3층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김 국수의 고향인 강진을 비롯해 영암과 신안에서 국제바둑대회가 열린다.

"바둑계 큰 행사가 고향에서 열려 감회가 남다르다. 이번 행사는 '한·중 단체바둑 대항전'과 '국제 페어바둑대회', '어린이바둑대축제'라는 세 가지 축으로 진행한다. 그만큼 다양성을 갖췄다. 추억의 스타들도 나오고 한중 최고수들의 단체전 등 볼거리도 많으니 국내 팬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중국과 일본 등 해외에서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대회장으로서 무엇보다 원만하게 대회가 치러지기를 바란다."

―강진에서는 김 국수의 이름을 딴 국제대회도 매년 열리고 있는데….

"2007년 어린이 바둑대회로 시작했다가 이듬해부터 국제 시니어 대회로 바꿨다. 아마추어들이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하며 수담을 즐기는 것이 보기 좋다. 지난해까지 7차례 열었다."

그가 바둑에 빠진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초등학교 때 셋째 형에게서 바둑을 배웠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바둑을 둘 줄 알았다. 그의 아버지는 강진 읍장을 지냈다.

"열두 살 때인가, 여름 방학 때였다. 도립병원에 들러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나무 그늘 밑에서 두 의사가 바둑 두는 걸 구경했다. 처음에는 내가 있는 걸 몰랐던 한 의사가 나를 보더니 '바둑 둘 줄 아느냐'고 해 '그렇다'고 하자 한판 두자고 한 게 시작이었다. 당시 나는 8 ,9급 수준이었다. 신혼이던 그 의사와 관사에서 통금 직전까지 여러 차례 바둑을 두다가 아버님께 불려갔다. 혼날 줄 알았는데 아버님은 되레 강진에서 제일 잘 두는 '강진 국수' 최경연 선생을 연결해줬다. 최 선생은 아마 초단쯤 되는 실력이었다. 당시는 바둑으로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 아버님이 무슨 생각으로 내게 바둑을 밀어줬는지…."

실력이 늘면서 아버지 친구의 권유와 아버지의 승낙으로 서울로 바둑유학을 왔다. 그때가 1955년 3월. 당시 그가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집에 있던 바둑판을 고치고 칠을 해서 서울로 갖고 온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 바둑판은 한 지인의 사무실에 뒀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소실됐다.

서울로 온 그는 강진 출신으로 아버지의 친구인 김성호 국회의원 집에 기거하면서 명동에 있던 한국기원에 나갔다. 거기서 아버지 친구의 소개로 이학진 선생에게서 바둑을 배웠다. 당시 한국기원은 나이든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소년으로서는 그가 유일했다. 그는 "당시 기원에 오던 분들은 좋은 분들이 많았고, 유학파도 있었다. 일본 기도(棋道)지를 정기 구독하는 분들도 많았다. 어린 내가 바둑을 두는 게 기특했는지, 일본 신문 기보를 갖다 주는 분도 계셨다"고 말했다.

당시 아마추어라도 급수를 받으려면 아마추어 대회에서 입상을 해야만 했다. 그는 6급부터 시작해 차례로 1급까지 올랐다. 1급에 오른 것은 송원기원에서 주최한 아마추어 바둑대회 갑조에서 우승했을 때. 소년 윤기현이 을조에서 우승했다. 그게 인연이 돼 윤 사범과 한국기원에서 하루에 3판 이상씩 6개월간 바둑을 뒀다. 또 어린 조훈현과도 만났다. 처음에는 8점 바둑이었는데 어느 순간 쑥쑥 늘더라고 회고했다.

그는 상경한 이듬해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전국대회에서 우승했다. 조남철 국수와 2점 접바둑을 두기도 했다. 한국기원에서 만난 분들은 모두 실전 스승들이엇다. 그는 상경 3년 반 만인 1958년 가을 입단대회에서 강철민과 함께 프로가 됐다. 이후 매년 승단해 4단으로 승단했다. 1962년 그는 돌연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났다.

"주변에서 '네가 성적을 내고는 있지만 일본 원생 최고수준에도 못 미칠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기보로는 일본 바둑을 알고 있지만 실전을 두지 못했으니 한번 부딪쳐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조남철 국수에게서 소개장을 받아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문하에 들어갔다. 기타니 선생은 제자들에게 시험기와 10번기를 두도록 한 뒤 나를 사범으로 받아들였다. 일본기원에서 프로 3단을 인증받았다."

김인 9단은 인터뷰 도중 파안대소하기도 했다. 뒤편 액자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孫在馨) 선생이 쓴  ‘상화조어(賞花釣魚)’라는 글귀.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낚는다’는 뜻이다. 한국기원제공.
김인 9단은 인터뷰 도중 파안대소하기도 했다. 뒤편 액자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孫在馨) 선생이 쓴 ‘상화조어(賞花釣魚)’라는 글귀.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낚는다’는 뜻이다. 한국기원제공.

젊은 일본 기사들은 '실력도 모르는 한국 기사에게 왜 3단을 주느냐'고 반발했다. 이 반발은 이내 사그라졌다. 바둑잡지 기도(棋道)가 마련한 '아마추어 4대 천왕과 프로' 간 이벤트 기전에서 승리했기 때문. 기쿠치 야스로(菊池康郞), 무라카미 분쇼(村上文祥), 히라타 히로노리(平田博則)를 내리 꺾었다. 아쉽게도 하라다 미노루(原田實)에게는 패했다. 당시 기타니 문하 기사인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를 지하철에서 만났는데 그는 "나라면 그런 기획에 응하지 않았다. '지면 손해, 이겨야 본전'인 그런 바둑을 왜 두느냐"고 했다. 여하튼 이후 신문기전에도 나가고 승단대회에도 나갔다. 그러던 중 병역문제 때문에 1년 8개월 만에 귀국해야 했다. 김 국수는 "당시 있기만 했어도 4단으로 승단할 수 있었는데, 내가 안돌아오면 보증인들이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라며 일본에서 4단을 받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청년 김인은 돌아와 입대해 육군본부 근무중대에 배속받았다. 근무중대는 체육특기자들이 주로 가던 곳. 거기에서 다시 국회연락장교단에 배속됐다. 국회 국방분과위원회에 나온 각 군의 참모들이 모인 곳이다. 당시 그는 국회의원과 군 장교들의 바둑 상대였다.

―일본에서 귀국해 조남철 국수에게서 국수 타이틀을 빼앗은 이후 6연패를 했다. 또 왕위 7연패, 패왕 5연패, 최고위, 명인 등 국내 타이틀을 휩쓸었다. 10년간 30회 타이틀을 따는 등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바둑계가 지금처럼 그리 치열하지 않았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남철 선생으로서는 나이 차(20세 차이)가 많이 나는 나와 승부하기가 거북한 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1972년인가 지인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을 때인데, 한 사람이 '서봉수가 명인이 됐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그때 아차 싶었다. 조 선생님이 나와 바둑을 두시기가 거북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서봉수는 김 국수보다 열 살 아래였고, 명인 타이틀을 땄을 때가 19세였다. 김 국수는 열 살 아래인 서봉수의 명인 타이틀 획득 소식에 '아직 젊은데…'라는 생각을 했고, 동시에 국수 타이틀을 놓고 스무 살 아래인 자신과 대국을 했던 조남철 선생에게 생각이 미쳤던 것 같다.
―당시 최고의 기량이었다. 최고로 만든 무엇인가가 있었을 텐데….

"나름대로 열심히 두었다. 대국 전에는 되도록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들판이나 야산을 다니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하고…." '최고로 만든 무엇'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당시 김 국수의 바둑을 평한 것을 보면 '중후하고 수읽기가 심오하다' '변하지 않는 청산' 등으로 평가했는데….

"당시 관전기를 쓰던 분들과 술도 같이 하고 자주 만나는 사이여서 좋게 봐준 것일 것이다. 당시에는 소설가 정비석 선생도 관전기를 썼다. 일본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관전기를 썼다."

그에게 술은 언제부터 배웠는지 묻자 "10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지방행사에 가면 늘 술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술에 관한 한 폭주보다는 밤을 새워 이야기하는 은근한 술을 좋아한다. 친구가 좋아서 술을 마셨고, 문인들과도 친했다. 신동문 시인과는 자주 어울렸다. 신 시인의 단양 농장에 가기도 했다. 고은 시인은 고향사람으로서 교류했다. 그는 일반 팬들과 술잔을 기울일 때도 있었다. 주종은 가리지 않았다. 맥주 소주 고량주…. 그러다 그는 2000년대 초반 위암 수술을 받아 위의 상당부분을 절제했다. 그 뒤로 한동안 술을 끊었다가 최근 다시 술잔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인터뷰 전에 김 국수의 술에 대한 일화를 들을 수 있었다. 한국기원 박장우 전문위원은 "수술하고 병원에 갔더니 사모님이 '그동안 같이 술 마시느라 고생했는데, 이젠 고생 끝났어요'라고 했는데 요즘 다시 술을 시작하시니…"라며 걱정했다.

김 국수는 늦은 나이인 44세에 결혼했다. 그는 "주위에서 결혼해야 한다는 말이 많았지만 어찌하다 보니 혼자 있는 게 편했다. 그러다 인연을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슬하에 아들(27) 하나를 두고 있다.

―프로가 된 뒤 56년이 지났다. 김 국수에게 바둑이 무엇인지.

"벌써 그렇게 됐나… 음… 생활 그 자체다. 학업 쪽도 병행했어야 했는데…. 이왕이면 바둑으로 들어선 이상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한국 바둑계가 번성해 국위 선양을 하고 나아가 세계를 제패하는 데 일조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인터뷰가 끝난 뒤 저녁을 함께했다. 김 국수는 국수산맥 대회에 녜웨이핑(¤衛平)이 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1980년대 후반에 만난 뒤 1990년대부터 교류를 했고, 중국에서 대접을 잘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번에 고향에서 한번 갚고 싶었는데, 병 때문에 못 온 게 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 유학시절 만난 린하이펑(林海峰) 9단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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