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로 끌려가 볼모 생활을 한 비운의 조선 왕세자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 중국 주선양한국총영사관은 22일부터 이틀간 랴오닝(遼寧) 성 선양(瀋陽)에서 소현세자의 행적을 기리는 제1회 사행단 문화축제를 열었다. 청나라의 옛 수도인 선양은 소현세자가 볼모로 붙잡혀 있던 곳이다.
함께 열린 국제학술제에서는 한국과 중국 학자 18명이 참석해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외교관 소현세자’의 활동을 집중 조명했다. 소현세자가 청에 붙잡혀 있던 시기는 1637년부터 1645년까지 8년간. 이 중 청이 명을 함락한 뒤 새로 수도로 정한 베이징(北京)에서 마지막 몇 개월을 보낸 것을 빼고는 줄곧 선양의 청나라 궁궐 인근에 마련된 심양관(瀋陽館, 조선관·朝鮮館으로도 불림)에 머물렀다.
세자의 심양관 생활은 패전국 왕자가 감수해야 할 모멸과 사대(事大)로 점철됐다. 하지만 당시 세자는 청을 향한 조선 외교의 최전선에서 고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음이 심양장계(瀋陽狀啓)와 심양일기(日記) 등의 문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세자는 자신을 호위하던 선전관(宣傳官)과 금군(禁軍)을 통해 선양의 첩보를 수집해 조선에 장계를 올렸다. 중요하고 긴박한 일이 발생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장계를 보냈고 파발마를 내주기도 했다.
일반 외교 사안도 세자의 몫이었다. 당시 청의 조선 업무를 관장했던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富大)는 수시로 선양관에 와서 세폐와 공물, 군병과 군량 징발 등에 대한 황명(皇命)을 전달하고 조선을 힐책했다. 세자는 그때마다 피폐한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설득했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소현세자가 머물렀던 심양관의 옛터를 찾기 위해 학자들이 현장을 방문하는 행사도 가졌다.
그동안에는 선허(瀋河) 구의 선양시립소년아동도서관이 심양관 터라는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실제 현장을 답사한 결과 이곳은 과거 청의 궁궐이 있던 곳으로 심양관 터로 보기에는 무리라는 지적이 나왔다. 따라서 옛 덕성문(德盛門)에서 북쪽으로 100m가량 떨어진 현재의 유치원이 심양관이 있던 자리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