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해학으로 질곡의 역사 비튼 ‘구라 3代’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3일 03시 00분


◇풍의 역사/최민석 지음/284쪽·1만3000원·민음사

탁월한 입담을 자랑하는 최민석 작가가 놀이터에서 돗자리를 깔고 애매한 포즈를 취했다. 민음사 제공
탁월한 입담을 자랑하는 최민석 작가가 놀이터에서 돗자리를 깔고 애매한 포즈를 취했다. 민음사 제공
멀리 스웨덴에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알란 칼슨이 있다면 한국에는 한평생 ‘허풍’으로 불린 이풍이 있다.

주인공 이풍은 1930년 서쪽 바다 섬 중도에서 태어나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온몸으로 겪었다. 일본군에 강제징집당하고 6·25전쟁에 얼떨결에 참전했지만 타고난 ‘구라발’과 ‘운발’로 영웅적인 활약을 펼친다.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계기를 만든 사람도 풍, 1952년 거제도 포로 소요사건을 해결한 진짜 주인공도 풍, 심지어 가수 조용필의 노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만든 사람도 풍이다. “여하튼 실상은 이러했으나, 역사의 그 어디에도 풍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누구나 알다시피, 역사는 권력자들의 시선이 가는 곳에서만 기록되는 법이다.”(107쪽)

뻥인 걸 알면서도 풍의 입담이 워낙 탁월해서 석 장을 넘길 때마다 한 번 웃는 삼장일소(三張一笑)를 하게 된다.

100세 노인 알란 칼슨은 비록 거세당했지만 배짱과 긍정으로 전 세계를 누볐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다닌다’란 이름을 가진 풍은 아들 구와 손자 언(이들도 본명보다 허구, 허언으로 불린다)을 남겼지만 식민지와 분단국가인 우리 땅의 한계 때문인지 같은 마을 출신 ‘앞잡이’의 마수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앞잡이는 일본, 미국, 독재 정권에 차례로 기생하며 풍을 계속 고난에 빠뜨린다.

소설 속에서 손자 언은 할아버지에게 배운 삶의 철학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짧건 길건 인생을 살아온 자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지나온 삶을 퇴고하고 싶어 할지 모른다. 나는 그렇기에 내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퇴고할 수 없기에, 다시 쓸 하루치의 원고지가 매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278쪽)

나는 어떤 이야기를 후대에 남길 수 있을까, 앞잡이의 손자였다면 이렇게 매력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자문하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문학계에서 ‘구라문학가’로 불리는 저자는 장편소설 ‘능력자’로 2012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은 지난해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전재됐고 같은 해 11월부터 한 달 동안 라디오에서 낭독되기도 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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