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7월 30일, 나치 점령하의 파리에서 서로 알게 된 유대인 남자와 플랑드르 출신 여자 사이에서 나는 태어났다.”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자서전 ‘혈통’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이 그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는 기둥이다. 전후에 태어난 그의 시선은 줄곧 그가 태어나기 직전의 시절, 즉 독일 점령기에 머물러 있다.
프랑스 사람이라면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욕의 시절, 망각의 시절에 집착하며 “점령기의 밤은 내가 태어난 원초적 어둠”이라는 말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그의 작품 세계의 특징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는 대독 저항운동도 했으나 일부는 적극적으로 독일에 협력하고 심지어 유대인의 체포와 학살을 묵인, 동조했다. 평상시라면 드러나지 않을 인간의 어두운 본성, 부끄러운 모습이 프랑스 역사의 암흑기에 오히려 꿈틀거렸다. 그의 시선은 그 어두운 시절을 직시하며 문자 그대로 인간의 정체와 본성을 암중모색했던 셈이다.
독일의 위협에 굴복하는 지식인들, 특히 동료 유대인을 죽음으로 이끄는 또 다른 유대인, 개인의 안위를 위해 택한 이중간첩 등은 그의 초기작 ‘에투알 광장’(1968년) ‘야간 순찰대’(1969년) ‘순환도로’(1972년)에서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인간상이었다.
독일 점령기, 그 어두운 시절은 연대기에 기록된 사실이자 동시에 인간과 역사를 설명하는 메타포이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호한 안개나 어둠에 싸여 얼핏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서사의 뼈대는 그 인물의 어두운 과거를 조금씩 파헤치는 과정으로 이뤄진다. 과거를 복원하는 그의 소설에서 악령처럼 반복해서 등장하는 인물은 작가의 아버지, 유대인이면서도 동족을 색출, 학살하는 무리와 모호한 관계를 유지했던 문제적 아버지이다.
어두운 역사의 산물인 아버지는 작가의 개인사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어머니와 아들을 버리고 한 빌딩, 다른 층에서 새살림을 꾸리는가 하면 방황하는 사춘기의 아들을 제 손으로 군대에 입대시키기도 했다. 어둠의 시절을 희미한 기억력에 의존하여 물증과 증인을 찾아 자신의 과거를 복원하는 과정은 결국 정체성의 재구성, 자아의 복원으로 이어진다.
그가 과거에 집착하는 보수주의자나 복고 취향에 편승한 향수를 자극하는 작가로 머물지 않고 결국 문학의 본령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깊은 사유와 아름다운 문장의 힘 덕분이다. 독일 점령기에서 비롯된 한정된 주제의식이 시공간을 넘어서서 보편적 인간의 문제에 도달했다는 것이 그를 특정 국가의 역사와 국경을 벗어나 우리 독자마저 사로잡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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