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어디에나 ‘숨은 영웅’이 있다. 평택 국악인 지영희(池瑛熙·1909∼1980) 선생이 바로 그렇다. 그는 천대받는 무당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도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국악천재였다. 해금, 양금, 피리, 단소, 무속음악, 농악, 경기민요 등 못하는 게 없었다.
악기면 악기, 소리면 소리, 게다가 우리 춤까지…. 그의 본명 ‘천만(千萬)’이 괜히 지어진 게 아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쌍피리의 신동’으로 불렸다. 전국 굿판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아우성이었다. 젊었을 땐 조선 최고의 춤꾼 최승희(1911∼1967)와 세계를 누비며 공연을 펼쳤다. 최승희의 무용음악을 반주했고, 최승희의 ‘화랑춤’ ‘즉흥무’ 등 수많은 무용음악을 작곡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지영희는 조선음악연구소의 악사로서 민족의 얼과 뿌리를 굳건히 지켰다. 당시 조선음악연구소는 조선 최고 명인명창 30여 명이 모여 만든 민족예술 육성학교였다. 광복 후엔 국악원총무로서 향토민요제전, 농악경연대회, 민속무용대회를 열어 국악을 되살리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1946년 서울중앙방송국 전속국악사가 됐고, 1960년 김소희 박귀희와 함께 서울국악예술학교를 세웠다. 그 뒤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초대상임지휘자로서 국악 현대화에 앞장섰다.
지영희의 업적은 무수하다. 사라진 악기 월금을 복원했고, 현종 비파 아쟁을 개량했다. 국악기를 키우거나 줄을 더해 크고 작은 소리나 높고 낮은 음을 만들었다. 양금(대해금)을 만들어 제1해금, 제2해금(대해금) 식으로 오케스트라연주가 가능하게 했다. 국악장단을 서양박자로 세밀하게 나눠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심지어 판소리가락까지 국악관현악단 무대에 올렸을 정도였다.
그의 국악채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서양음악가 김동진 선생을 찾아가 악보와 화성악을 배웠다. 그리고 7년 동안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떠돌며 무속장단을 채보했다. 녹음기 하나 달랑 들고 사라져가는 우리 민요 가락을 담았다. 그것이 오늘날 ‘강강술래’ ‘매화타령’ ‘정선아리랑’ ‘오광대춤 놀이’ 등 수백여 곡의 민요로 살아남았다. 그는 온종일 두드리고, 적고, 녹음하는 게 일이었다. 오늘날 그가 남긴 ‘민속음악연구자료집’은 국악계의 바이블로 통한다.
그는 해금, 아쟁, 피리, 태평소, 가야금교본 등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오던 것을 오선지에 옮겨 국악교재를 냈다. 신상옥 영화감독과 ‘벙어리삼룡이’ ‘사도세자’ ‘장희빈’ 등 영화국악음악도 만들었다. ‘만춘곡’ ‘휘모리’ 등 국악창작곡도 발표했다. 국악관현악단 지휘 땐 사모관대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나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지영희도 세상의 시샘은 넘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신문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보유자 지영희 국악협회 제명’이라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그는 그 이후 모든 걸 내려놓았다. 그저 묵묵히 제자들만 가르치다가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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