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멍 때리기 대회’를 진행하는 프로젝트 듀오 ‘전기호’. 남녀 2명의 예술가로 이뤄진 이 콤비는 절대 실명을 쓰지 않는다. 여성 멤버는 ‘웁쓰양’, 남성 멤버는 ‘저감독’으로 불린다. 많은 사람들이 ‘저기… 저쪽에 있는 저 감독 말이야’라며 남성을 부르자 아예 활동명을 ‘저(that)감독’으로 붙여버린 것이다. 각자의 이름으로 활동하던 이 콤비는 올해 초 ‘멍 때리기 대회’를 준비하며 팀을 결성했다.
거창한 뜻을 가진 것처럼 보인 ‘전기호’라는 팀명은 황당하게 지어졌다. “멍 때리겠다”며 시청 광장 사용 허가를 받으러 온 이들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공무원 ‘전기호 씨’가 인상 깊어 팀 이름을 ‘전기호’라고 지었다.
프로젝트 듀오 ‘전기호’가 여는 ‘멍 때리기 대회’는 무엇일까? ‘멍 때리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신조어다. 아무 생각 없이 넋을 놓고 있는 행위를 ‘멍 때린다’고 표현한다. 직장인들이 월요병에 시달리며 오전 업무를 마치고 밥을 먹는 점심시간에 이들은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여 ‘멍’을 때리기로 했다. 참가자는 50명인데, 선발 경쟁률이 3 대 1이었다.
멍 때리는 게 좋아… 다같이 멍 때리면 어떨까
웁쓰양이 대회를 구상하게 된 것은 올해 2월. 방에서 빈둥빈둥 ‘멍 때리기’를 하다가 이 대회를 생각했다. 차도, 사람도 바쁘게 움직이는 서울 한복판. 이곳에서 참가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다. 그리고 그들의 ‘멍 때림’을 구경하는 시민들이 대조를 이루는 장면을 연출해보고 싶었던 것. 아무것도 하지 않은, 가장 정적인 존재가 우승을 하는 것이다.
사실 웁쓰양은 지난해 ‘아현동 재개발지역’에서 또 다른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홍익대 앞에서 잘나가는 젊은 예술가’다. 그녀는 굴착기가 휩쓸고 지나가 폐허가 된 아현동 골목마을에 사람들을 모았다. 골목을 중심으로 두 편으로 갈라선 뒤 염료가 든 물풍선과 물총을 사정없이 쏘아댔다. 피 터지는 전쟁 끝에 남은 것은 형형색색 보기 좋게 물든 골목이었다. 철근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망가진 동네가 다시 탄생한 순간이다.
이때 프로젝트의 재미를 느낀 웁쓰양은 다시 한번 일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넋 놓고 있는 것을 잘못이라 여기고,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정답으로 여기는 사회에 반기를 들고 싶었다. 분명 자신처럼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 같았다. 웁쓰양은 ‘아현동 프로젝트’ 당시 참여했던 예술가 ‘저감독’에게 대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웁쓰양의 행보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예술가 ‘저감독’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신병원, 서울시청 찾아다니며 읍소
대회를 열기로 한 웁쓰양과 저감독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우선 ‘대회’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공신력 있는 평가 기준을 갖춰야 했다. 수년째 예술 프로젝트만 해온 이 콤비가 평가 기준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멍을 때린다’는 것이 일종의 정신활동이라고 본다면, 정신과 전문의의 조언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집 근처(인천 남구)에 있는 정신과 전문병원 중 규모가 큰 곳을 찾았어요. 황원준신경정신과를 그때 알게 됐어요.”
입구에서 간호사에게 “멍 때리기 대회 자문하러 왔다”고 말하면 문전박대를 당할 게 뻔했다. 웁쓰양은 태어난 지 38년 만에 처음 정신과 진료카드에 자기 이름을 올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고민이 많고, 밤엔 잠에 오질 않고….’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겪을 만한 작은 증상들을 적은 뒤 황원준 원장이 있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를 받으러 온 게 아니라 대회 자문을 하러 왔다는 말에 황 원장은 깜짝 놀랐다. 그 대회가 ‘멍 때리기 대회’란 말에 헛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웁쓰양의 설득은 꽤 진지하게 들렸다.
“몸이 물을 원하니까 물을 마시고 싶고, 잠을 원하니까 졸게 되는 거잖아요.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멍 때리기에 빠지는 것도 몸이 ‘멍 때림’을 원하기 때문 아닌가요?”
한 달 정도의 회의 끝에 평가 기준이 완성됐다. 심박측정기에서 심박수가 가장 안정적으로 나오는 사람이 1등이다. 중간에 크게 움직이거나 딴짓을 하면 자동 실격이다. 선정 방식을 공개한 뒤에도 문의 글은 끊이지 않았다. 껌은 씹어도 되는지, 하품은 해도 되는지 말이다.
“이것을 대회라고 부를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자는 의미로 ‘우승’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거예요. 편하게 ‘멍 때리러’ 오면서 ‘어떻게 하면 1등 하죠?’라고 묻는 것을 보면 안타깝죠. 즐기려고 하는 일인데 말이에요.”
장소는 ‘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결정했다. 원래는 6월경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면서 나라 전체가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 난관에 봉착했다. 추모 행렬이 이어지는 이곳에서 황당한 ‘멍 때리기 대회’를 열긴 어려웠다. 공무원 ‘전기호’ 씨의 도움을 받으며 행정절차를 밟던 이 팀은 이름을 ‘전기호(electronic ship)’로 짓는다.
10월 27일 광장 사용 승인을 받고 싶어 하는 다양한 단체가 모여들었다. ○○○농민단체, ×××노동연합 등 머리에 ‘투쟁띠’를 두른 투사들 사이에 프로젝트 듀오 ‘전기호’가 앉아있었다. 사용 승인을 두고 경쟁을 벌이려던 투사들은 황당한 젊은이들의 계획을 듣고 시간을 양보해줬다. 프로젝트 듀오 ‘전기호’가 주최하고 ‘황원준 신경정신과’가 후원하는 27일 서울광장 ‘멍 때리기 대회’는 그렇게 탄생했다.
우리가 멍 때리러 오는 이유요?
재미로 모집했던 ‘멍 때리기 대회’에 사람들이 몰렸다. 당초 참가 인원을 40명으로 계획했다가 “제발 정원을 늘려달라”는 요구가 쏟아져 50명으로 변경했다.
선발 기준은 ‘자기소개서’였다. ‘멍 때리고 싶은 이유’를 얼마나 성의 있게 쓰느냐가 관건이다. ‘전기호’ 측은 선발된 50명 중 몇몇 지원자의 소개서를 사례로 들며 ‘멍 때리고 싶은’ 우리의 모습을 설명했다. 본보 취재팀은 이들 중 일부를 사전 연락해 ‘당신은 왜 멍 때리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고등학교 1학년 성혜민 양은 학교를 빠지고 이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담임선생님께 체험학습 신청을 냈고, 대회의 취지를 전해 들은 선생님은 흔쾌히 결석을 허락해줬다. 성 양은 “‘멍 때린다’는 말을 중의적으로 해석해 봤다. 내 마음에 있는 ‘멍’을 때린다는 의미로 참가하려 한다. 마음의 ‘멍’을 때려서 없애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성 양이 말한 ‘멍’은 학교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였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이 학생은 미술을 배우기 위해 특성화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보다는 취업에 유리하다는 제품디자인을 선택해서 공부를 하게 됐다. 취미로 미술을 하는 건 즐거웠지만, 매번 작품으로 평가받고 ‘100점 만점에 몇 점’으로 낙인찍히는 생활이 적잖이 상처로 남았다.
“대학 안 간다고 대충 공부해도 된다는 건 옛말이에요. 요새는 성적 보는 회사, 포트폴리오 보는 회사 제각각이라 무엇 하나 소홀히 하기 힘들어요. 디자인은 마음처럼 되지 않고, 중학교 때보다 몇 배나 떨어진 성적을 보면서 마음에 멍이 생겼어요.”
졸업 후 취업할 계획인 성 양은 처우가 좋은 회사에 입사하려면 내신과 포트폴리오 모두 훌륭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멍을 때리며 지친 마음에 휴식을 주고 싶어 했다. 매일 1점이라도 더 얻기 위해 디자인 아이디어를 짜내는 두뇌활동을 잠시 멈추고 1시간만이라도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다는 것이다.
또 다른 참가자는 40대 수의사 박문수 씨다. 그가 ‘멍 때리기 대회’ 참가자로 선발됐다는 소식을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너는 1등 할 것이다’라는 친구들의 댓글이 쏟아졌다.
“제가 남들보다 눈이 커요. 저는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은 ‘넌 눈만 깜빡깜빡거리면서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 같다’고 말해요. 오해는 아닌 것 같아요. 제가 공상을 많이 하거든요. 제가 아니면 누가 ‘멍 때리기 대회’ 1등을 하겠어요?”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7시에 병원 문을 닫는 박 씨는 ‘그렇게 넋 놓고 살면서 수의대 공부는 어떻게 했느냐’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멍 때리는 시간이 많다. 하지만 박 씨는 멍 때리는 시간을 갖는 게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긴장을 풀고 기분 좋은 상상을 하거나, 궁금한 것들을 고민해보는 생산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하루 종일 아픈 동물과 그 보호자에게 시달릴수록 멍 때리는 시간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주최 측은 참가자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드러낼 수 있는 복장을 하고 오라고 주문했다. 박 씨는 수술복을 입고, 자신의 병원에서 살고 있는 개 한 마리를 끌고 올 예정이다. 피자 배달부로 일하는 한 20대는 배달 복장에 헬멧을 쓰고 나타날 계획이다. 인도철학을 전공한다는 한 대학원생은 “고품격 멍 때리기를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며 드레스 코드를 비밀에 부쳤다. 27일 서울광장에선 이렇게 다양한 신분에, 다양한 이유로 ‘멍 때리는 사람들’의 조용한 전투가 진행될 것이다. ▼ “뇌도 가끔은 쉬어야죠… 단, 오래하면 안됩니다” ▼
‘멍때리기 대회’ 후원하는 황원준 원장
“멍 때리는 게 마냥 좋은 행동은 아니죠. 그래도 쉼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는 일부러 멍 때릴 필요가 있어요.”
이 대회의 후원 기관인 황원준신경정신과의 황원준 원장(53·사진)은 ‘누가 더 멍을 잘 때리는가’ 평가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다. 뇌파, 혈압, 심박수 등 정신상태 변화를 표현할 수 있는 지표 중 하나를 기준으로 삼으면 된다. 지표는 여러 가지지만 각 지표를 측정하는 데 드는 액수가 천차만별이어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야외에서 여러 명이 진행하는 행사인 만큼 측정방법이 간단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 방식을 선택하기로 했다.
멍 때림을 측정하려면 순간적인 뇌파의 변동까지 측정할 수 있는 기기가 필요하다. 몸이 충분히 이완된 상태에서는 알파파가 지속적으로 체크되지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주의력이 흐트러지면 베타파 등 기타 뇌파가 측정된다. 황 원장은 참가자들에게 지인들로부터 이 기기를 빌려주려 마음먹었다. 하지만 고가의 기기를 빌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격 대비 성능이 가장 좋은 측정기기는 심박측정기였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외부의 자극에 몸이 반응할 때는 심박수가 높아지고 혈압도 올라간다. 대회 취지에 맞게 멍 때리기를 잘하고 있다면 심박수가 일정상태를 유지한다. 가격도 개당 5만 원 정도여서 이 기기 50여 대를 빌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황 원장은 멍 때리기가 마냥 좋은 상태라고 보지는 않는다. 장시간 지속되는 멍 때리기는 우울증, 무기력증 등으로 이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트레스에 노출된 현대인들은 업무나 공부에 지친 뇌를 쉬고 짧은 시간이라도 ‘명상’을 해야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질병을 피할 수 있다. 그는 “최근 병원을 찾는 환자의 대부분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정신질환을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의식적으로 스트레스를 씻어내는 ‘멍 때리기’를 통해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