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엔 단계마다 즐거움이 숨어있다. 그 첫 단계는 계획세우기다. 여기로 갈까 저걸 볼까, 혼자서 하루에도 수십 번 장소를 바꿔가며 기막힌 여행을 꿈꾼다. 그 순간마다 뇌에선 행복물질 엔도르핀이 팡팡 샘솟는다. 생각 자체만으로도 즐거우니 노력 안하고 행복해지는 최고의 비결이다. 두 번째는 함께 갈 사람과 함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때다. 여기 가선 뭘 할까. 저기 가선 뭘 입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만큼은 온 세상이 제 것이 된 듯하다. 힘 안들이고 세상을 소유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세 번째는 짐 싸기다. 이것이야말로 여행 최고의 즐거움이다. 출발을 앞두고 이걸 가져갈까 저건 뺄까, 매일 짐을 쌌다 풀었다하는 그 과정이다. 고민 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경우는 아마도 세상에 이것뿐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은 비행기에 오를 때다. 미지의 목적지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 그게 막연한 기대감에서 비롯된 야릇한 흥분과 긴장감과 범벅이 되어 온 몸을 감싼다. 그건 분명 고통일 터. 그러나 실제는 정반대다. 첫사랑을 처음 본 그 순간처럼 혼란스러우면서 미묘한 감정이다. 세상의 행복 가운데 가장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게 바로 이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한다면 그건 무사히 집에 돌아왔을 때다. 왜냐면 ‘집 떠나면 고생’이니까.
이런 여행. 우리 모두는 한순간도 쉼 없이 꿈꾸고 또 떠난다. 그런 우리 중에 내년 유럽여행을 꿈꾸는 분이 있다면 스위스를 꼭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거기서도 마터호른 봉이 있는 산악관광마을 체르마트를 찾아보라고 강력히 권한다. 그것도 7월과 8월이면 좋겠다. 그런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내년이 마터호른 봉의 초등 150주년이어서다.
킥바이크 타고 맑은 공기를 흠뻑
7, 8월 두 달 동안 체르마트에서는 마터호른 초등을 주제로 만든 영화가 상영되는 등 다양한 행사가 예고돼 있다. 그게 아니라도 마터호른 봉을 찾을 이유는 너무도 많다. 세상의 산봉우리 가운데 가장 포토제닉해서다. 그리고 이곳은 스위스 알프스의 4000m급 고봉 48개 중 38개가 포진한 발레 지방의 한 중심이다. 그런 만큼 이곳 산악에서 하이킹을 하면 스위스가 자랑하는 360도 파노라마 산경 중에 가장 멋진 것을 원도 없이 보게 된다. 체르마트 주변의 고르너그라트 능선 등지에는 400km의 하이킹 트레일과 100km의 산악자전거 길이 있다.
내가 체르마트를 찾은 것은 지난 9월. 거의 10년 만에 다시 찾은 것인데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마을이 좀더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단장된 것 외엔. 나는 비 오던 날 아침, 마터호른 봉의 모습과 주변 고봉의 파노라마가 가장 인상적으로 펼쳐지는 수네가(2288m)를 기차로 올랐다. 그리고 킥바이크(Kick bike)를 타고 산길을 내려오며 체르마트 계곡의 산악을 섭렵했다. 킥바이크는 페달과 체인, 안장이 없는 자전거. ‘큰 바퀴의 킥보드’라고 보면 된다. 역시 한 발을 구르며 타지만 이런 산악에선 다운힐만 하므로 그런 수고도 필요 없다. 도중에 경치도 감상하고 사진도 촬영하며 또 산중호텔에서 커피도 마시며 두 시간동안 천천히 내려오는 킥바이크 여행. 내년 여름 체르마트에 가거들랑 꼭 한 번 따라 해보기를 권한다. 알프스의 산악을 제대로 즐기는 새로운 방법이다.
한여름 체르마트에선 아주 특별한 체험도 준비돼 있다. 스키다. 한여름에 무슨 스키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지구상에 그런 곳이 몇 곳 있다. 빙하지대인데 미국의 마운트후드(오리건 주),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슈투바이탈(인스부르크 부근), 그리고 이곳 체르마트다. 마터호른 봉 아래를 지나는 테오둘 빙하가 그곳. 여름뿐 아니라 일년 365일 개장한다. 내가 찾은 그날도 수백 명이 스키를 즐기고 있었다. 해발고도가 4000m가 넘는 빙하스키장의 당시 기온은 영하 3도. 겨울에 입던 스키복이 이곳 한여름 빙하에서도 제격이었다. 테오둘 빙하 스키장은 지구상에서 가장 풍광이 멋진 곳이다. 마터호른 봉을 마주보고 그걸 향해 달려 내려가니 이론의 여지가 없다. 나는 거기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슬로베니아 등 8개국의 평창겨울올림픽 꿈나무 스키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도 보았다.
전기차만 다니는 해발 1620m 청정마을
체르마트는 알프스의 허다한 산악관광마을 가운데서 최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이유 중 첫 번째는 ‘더 맑은’ 공기다. 해발 1620m의 이곳엔 호텔이 121개나 되고 상주인구도 6000명이다. 결코 적지 않다. 그런데도 자동차가 없다. 알프스 최초이자 유일의 카 프리 빌리지(Car free village)다. 물론 차가 있다. 모두가 소형 전기차다. 심지어 공사자재를 실어 나르는 화물차까지도.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대기오염이 전혀 없다는 게 이 마을을 찾는 여행자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두 번째는 역시 마터호른 봉이다. 마을 어디서도 보이며 시시각각 구름과 햇빛의 조화로 그 모습이 변한다. 특히 해뜰 녘 빨갛게 물든 모습은 압권이다.
세 번째는 산악열차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산정에서 즐기는 다양한 액티비티다. 체르마트 마을에는 톱니레일 방식의 산악철도 두 개와 테오둘 빙하로 데려다주는 케이블 시스템(곤돌라)이 있다. 철도는 로트호른(3103m)과 고르너그라트(3089m), 곤돌라는 클라이네 마터호른 봉(3883m)의 ‘마터호른 글래시어 파라다이스’를 운행한다. 이 세 곳의 역에는 모두 4000m급 알프스 고봉이 펼치는 멋진 파노라마 산경을 편안히 감상할 수 있는 테라스 식당이 있다. 그중 고르너그라트에서는 마터호른 봉의 모습이 가장 멋지게 다가온다. 로트호른 봉으로 오르는 중간의 수네가는 햇빛이 잘 들어 한겨울의 알프스 설경을 감상하기에 좋다. 마터호른 글래시어 파라다이스는 테오둘 빙하 스키장의 전망 레스토랑을 겸하는 시설. 거기엔 지하 빙하궁전(글래시어 팰리스)과 실내외 전망대, 시네마 라운지(마터호른 영상방영), 설상공원(스노튜브 라이딩)이 있다. 바깥 계단은 클라이네 마터호른 봉의 정상으로 연결되며 거기선 마터호른 봉이 지척으로 가깝다.
마지막으로 체르마트 마을의 매력을 하나 더 들자면 아주 고전적인 산악마을의 분위기다. 마을 전체가 전통목조샬레(3층 가옥)고 그 사이로는 예스러운 좁은 골목이 이어지는데 곳곳에 100년도 넘은 낡은 집이 잘 보존돼 있다. 호텔과 식당, 상점이 밀집된 중심거리 역시 고답적이다. 그 거리는 배낭을 메고 있는 등산객과 관광객, 손님을 실어 나르는 마차와 앙증맞은 전기차로 북적인다. 1865년 마터호른 봉에 초등한 영국인 에드워드 윔퍼가 묵었던 호텔 몬테로사도 여기서 만난다.
이런 체르마트이다 보니 오기 전 계획은 의미가 없다. 왜? 와서 보면 그게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인데 너무도 할 게 많아서다. 오로지 필요한 건 하이킹에 필요한 등산화 모자 배낭 선글라스 그리고 무엇이든 도전해볼 뜨거운 열정뿐이다. 권하건대 적어도 사흘 밤은 묵으며 고르너그라트와 로트호른, 마터호른 글래시어 파라다이스의 하이킹 트레일을 두루 섭렵하길 바란다. 우리 산에선 느낄 수 없던 새로운 감흥이 폭포처럼 쏟아질 터이니.
▼Travel Info▼
찾아가기
◇스위스: 대한항공은 인천∼취리히 직항노선을 올여름 시즌(6∼10월 화 목 토 인천출발)에 한해 재개했다. 11월부터 내년 5월까지는 기존의 경유노선(인천∼빈∼취리히)으로 운항. 내년 여름에도 직항노선은 재개될 가능성이 높다. ◇체르마트: 스위스철도 이용. 취리히공항역∼취리히중앙역∼비스프(Visp)∼체르마트. 출발시각에 따라 한 번(비스프) 혹은 두 번 갈아탄다(소요시간 세 시간 반 전후). 비스프∼체르마트는 글래시어 익스프레스 운행 구간. www.glacierexpress.ch
스위스패스
스위스 여행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만능교통카드. 모든 철도와 페리(호수), 포스트버스와 트램(시내전차)에 통용되며 케이블 시스템과 산악열차는 할인. 운행정보 및 갈아타기는 애플리케이션 ‘SBB’가 안내해준다. www.MySwitzerland.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