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시인 호소다 덴조 씨가 서울 청계광장 앞에서 사진을 찍던 중 손으로 L자를 그려보였다. L자는 스페인어로 ‘Lucha’(싸움)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계속 시와 싸워보겠다는, 문학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망팔(望八)의 시인은 카메라 앞에서 짓궂은 표정을 짓더니 알파벳 ‘L’자 모양으로 만든 손가락을 내밀었다. 사랑(Love)이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페인어로 싸우자는 ‘Lucha’의 L입니다. 감옥에 서 늘그막 탈출한 탈옥수 같은 제가 시와 한번 싸워보겠다는 뜻입니다.”재일교포 시인 호소다 덴조(71). 2012년 출간한 첫 시집 ‘골짜기의 백합’(사진)으로 지난해 ‘일본 시인의 최고 등용문’이라 불리는 ‘나카하라 추야’상을 수상했다. 역대 최고령 기록을 세웠다. 그는 한성례 시인의 번역으로 한국어판(서정시학)이 이달 출간되자 한국을 방문했다. 》
호소다 씨는 일제강점기 가난에 시달리다 일본으로 건너온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중학생 시절 국어시간에 읽은 시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부모 몰래 가쿠슈인대 문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정작 대학에서 문학을 배우고 인생에 대한 고민이 걷잡을 수 없이 깊어졌고 사랑까지 실패하면서 더는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중퇴했다”고 했다.
문학을 접고 돈벌이에 매달렸는데 일이 술술 풀렸다. 산업폐기물업체 호소다상사를 세우고 대표가 됐다.
인생이란 감옥에 한줄기 서광은 2004년에 비쳤다. 그는 시인 마치다 고의 시 ‘여름의 전멸’을 읽고 전율했다.
“10행의 시 속에 인간의 인생과 삶, 세상, 사회 등 모든 것이 응축돼 있었어요. 인간이란 대자연의 횡포로 전멸할지 모른다며 미래를 예상하고, 만약 전멸한다면 슬픔과 아픔도 같이 전멸하자, 모두 웃으면서 전멸하자고 했지요. ‘이제 시를 쓰자’ 결심했습니다.”
홀로 습작하던 그는 2008년부터 신문사 문화센터에서 시를 배웠다. 강사는 “당신이 쓴 것은 시가 아니다. 시집 낼 꿈도 꾸지 말라”며 비웃었다. 그래도 그는 컴퓨터 앞에서 묵묵히 자판을 두드렸다. 그는 한국어판 시인의 말에 “시와 씨름하는 일이 유희를 하듯 즐겁다. 누르고 누르다 보면 손가락 사이에서, 또는 행간에서 흘러넘치는 것이 있다”고 썼다.
그는 뿌리를 찾고 싶어 아버지의 집 주소 ‘강진군 작천면 궁시리 507번지’를 여러 번 찾아갔지만 그 주소를 찾을 수도, 아버지를 아는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아픔을 담은 시 ‘저기요(あの)’에서 ‘나는/ 고향 말을 할 줄 모른다/ 고향 사람들은 일본말을 할 줄 모른다/ 배가 고프면 저기요 하며 울상을 짓고/ 졸리면 우우 신음했다’고 썼다. ‘조부기(祖父記)’란 시에선 ‘조선의/ 흰 무명옷을 입은/ 그런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손자에게 말한다.
호소다 씨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비롯해 전쟁 피해자들이 죽어가고 있다”며 일본의 전쟁 책임을 시로 묻는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베리아에 다녀온 일본인 친구 스기야마에게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참상을 기록하라고 요구한다. ‘협박 일기’란 시에서 ‘조선 글자로 쓴 노트 1946이 타들어간다./ 스기야마에 대한/ 내 협박도 점점 괴이해져간다’고 썼다.
시집은 비극이나 슬픔도 유머로 감싼다. ‘철학하는 밤’이란 시에선 ‘나는 왜 태어났을까’ 진지하게 묻는 재일교포 3세 아들에게 ‘간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답하는 식이다.
“일본으로 건너온 아버지 세대에겐 유머 감각이 있었어요. 아무리 힘들게 고생해도 웃으면서 일했고, 아버지 형제들이 모이면 서로 웃겼어요. 우리 뿌리에는, 이데올로기에는 유머가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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