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 음식강산]뽀글뽀글 김치찌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2일 03시 00분



김화성 전문기자
김화성 전문기자
햇귀가 부쩍 짧아졌다. 아침 동살이 뭉툭하게 잡힌다. ‘귀때기가 얇아지는 11월’(서정춘 시인). 막대기 두 개가 대책 없이 뼈로 서 있다. 영락없이 ‘해거름, 허위허위 빈 들판을 걸어가는 두 사내의 등 굽은 뒷모습’이다. 참새들이 쪼르르 쫑쫑 부산하다. 차가운 바람살은 조근조근 옆구리로 저며 든다. 강물이 여위었다. 사람들 눈도 깊고 그윽해졌다.

저 핏빛 노을 좀 봐! ‘해질 녘이면 누구나 노을 한 폭씩 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서성거린다.’(조태일 시인) 가슴이 헛헛하다. 와락 불이 붙는다. 김치찌개가 자글자글 끓는다. 뽀글뽀글 어머니 냄새가 자진모리장단으로 익는다. “아들아, 밥은 잘 먹고 댕기는 겨∼?” 저승의 늙은 어머니가 느럭느럭 한 말씀 하신다. 어휴, 아직도 자식 걱정이신가.

김치찌개는 대한민국 어머니 수만큼 있다. 김치가 열이면 열, 집집마다 다르듯이, 김치찌개도 방방곡곡 들꽃처럼 만발한다. 어머니 손맛에 따라 그 맛이 오묘하게 춤을 춘다. 칼칼하고 구뜰한 맛, 시큼하면서도 담백한 맛, 매옴 들큼하게 당기는 맛, 평생 날마다 먹어도 질리지 않는 시원한 감칠맛…. 가히 국민찌개요, 국민요리다.

김치찌개는 라면 끓이기만큼이나 쉽다. 레시피도 간단하다. 김치, 돼지고기, 두부에 다진 마늘, 풋고추, 고춧가루, 소금 정도만 있으면 누구나 기본 맛은 낼 수 있다. 돼지고기 대신 멸치나 꽁치, 고등어, 참치, 어묵, 햄, 소시지를 넣어도 된다. 소금 대신 액젓, 새우젓을 쓰기도 한다. 당면이나 국수, 라면사리를 슬쩍 넣어 먹는 맛도 쏠쏠하다. 그렇다. 김치는 음식의 감초다. 죽었던 맛도 김치가 들어가는 순간 화르르 되살아난다. 김치김밥, 김치라면, 김치버거, 김치피자, 김치샌드위치, 김치볶음밥, 김치말이국밥, 김치장떡, 김치두부두루치기, 김치비빔국수, 김치만두….

김치찌개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김치다. 하지만 김치는 잘난 체하지 않는다. 낮에 나온 반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어우러진다. 모든 것을 무한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아무리 독특한 재료라도 그저 김치와 한바탕 보글보글 끓기만 하면 스르르 풀어진다. 김치에 중화돼 제 맛을 버리고, 기꺼이 ‘김치보조 맛’으로 다시 태어난다.

김치찌개엔 묵은지가 기본이다. 김치가 1년쯤 문드러져 곰삭아야 묵은지라 할 수 있다. 기껏 1, 2주일 숙성된 것은 익은지일 뿐이다. 익은지가 오래되면 시어터진다. 신 김치엔 생김치를 약간 섞으면 된다. 생김치는 오래 끓이면 잎이 오그라지고 흐물흐물해진다. 익은지나 묵은지는 웬만큼 끓여도 사각거리는 맛이 남아 있다.

김치찌개는 ‘엄청 센 불에 눈 깜빡할 새 끓여내야’ 맛있다. 불땀소리가 한여름 소나기 몰아치듯 ‘우르르’ 나야 한다. 약한 불로 뭉근하게 오래 끓이다 보면 칼칼한 맛이 사라진다. 양은냄비에 신 김치를 넣어 끓이면 김치의 산(酸) 성분 때문에 냄비의 알루미늄 성분이 녹아든다. 뚝배기나 스테인리스 냄비가 제격이다.

요즘 일반 식당의 김치찌개는 ‘공장 묵은지’를 쓰는 게 보통이다. 국물도 사골육수나 멸치육수를 쓰지 않고 맹물이나 고작 뜨물을 쓴다. 김치공장에선 오랜 시간 발효시켜 묵은지를 만들지 않는다. 채산성이 맞지 않아 ‘강제 숙성’시킬 수밖에 없다.

내로라하는 김치찌개 전문식당에서는 나름대로 김치를 차별화하려 애쓴다. 김치공장과 계약을 하거나 시골에서 공급받는다든가 하는 식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2, 3개월 익은지’가 일반적이다. 장안엔 인기 김치찌개 식당들이 많다. 1977년 문을 연 서울 한복판의 광화문집(02-739-7737), 김치찜 원조로 이름난 서대문 한옥집(02-362-8653), 김치찌개를 채소 쌈으로 싸먹는 을지로4가 방산시장 은주정(02-2265-4669·사진) 등이 그렇다.

늙은 은행나무가 으스스 떤다. 우듬지의 모과 하나가 간당간당하다. 11월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한 달. 새벽 찬물에 머리를 헹구듯 정갈한 달. 메스껍고 느끼한 것들이 말갛게 가라앉는 달.

시도 때도 없이 사는 게 비릿하고 느글느글하다. 문득 칼칼하고 시원한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 도대체 어머니는 어떻게 알고 그때그때 내가 원하는 김치찌개 맛을 콕콕 집어 끓여내셨을까. 살짝 새척지근하며 시큼한 맛, 매옴 들척지근 달콤새콤한 맛 그리고 땀 뻘뻘 알싸하고 맵싸한 맛, 엇구수하며 쌈박하고 개운한 맛….

‘허기 속에 기다리던 저녁밥상/한가운데 구수한 김이 산같이/뭉게구름으로 피어오르던 그 김치찌개//맛이 다 간 신 김치가 싹둑싹둑/산해진미로 변신했던 요술찌개//이제도 아른거리는 정겨운 어머님 냄새/오늘 식탁 위에 그윽하게 번져오를/엄니김치찌개’.(장태평 ‘김치찌개’에서)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김치찌개#음식강산#김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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