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돼버려 새로울 것 없는 이미지들이 한국 산수화에 등장했다. ‘일상에 잠복한 기이한 낯섦’을 수묵으로 포착해온 유근택 성신여대 동양화과 교수(49)는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를 그릴 때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중국의 관념적 산수 대신 ‘지금’ ‘여기’의 실경에 주목한 정선처럼 그도 21세기 한국의 진경에 충실했다는 뜻이다.
다음 달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OCI미술관에서 열리는 ‘끝없는 내일’전에 나온 그의 ‘산수’ 연작 10점은 동양화의 현대화, 좀 더 정확히는 ‘현실화’라는 스스로 출제한 문제에 대해 가로 2.7m, 세로 1m 크기의 한지에 수묵으로 써낸 답들이다.
천혜의 절경을 마다하고 충북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에 걸쳐 있는 인공호수 충주호의 풍광을 소재로 택한 것부터 진경을 그리겠다는 태도가 확실하다. 뭉개진 윤곽이 그려내는 물 빠진 돌산은 “이런 데 오고 싶지?” 하고 유혹하는 모양새가 아니다. 데칼코마니처럼 수면에 비친 산세는 더욱 흉흉하다. 작가가 수학여행 길에 들른 충주호가 꼭 이랬다. 물이 빠져 흉측해진 풍경 아래에서 사람들은 자연에서 치유받겠다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며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산수, 어떤 유령들’에선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와 황금빛 맥도날드 로고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같은 서구 문명의 아이콘들이 홍수처럼 밀려온다. ‘산수, 떠내려온’에는 고전적 산수화 속 호젓한 고깃배 대신 가구와 변기와 빨래 건조대 같은 온갖 집기들이 가득 실려 있다. 이것이 작가가 바라본 한국 사회의 ‘진경’이다.
386세대인 작가는 “걸개그림이 아니면 미술로 쳐주지도 않던” 민중미술의 시대에 ‘개인’과 ‘일상’에 주목해 파란을 일으켰다. 할머니의 얼굴이나 어린애 장난감으로 어질러진 거실, 샤워하는 모습 등 집안 풍경을 주로 그려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시선을 바깥 사회로 돌렸다.
서울 경복궁 근처 옛 미국대사관저를 보호하던 키 높은 돌담장을 그린 ‘말하는 벽’ 연작도 그렇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돌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재잘재잘 수군수군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담장 아래엔 게임기를 들여다보는지 아이들이 책가방 메고 신발주머니 든 채로 어깨를 맞대고 열중해 있다. 모두가 말하지만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끼리끼리 모여 견고한 벽을 쌓는 지금 이곳의 소통 방식과 겹쳐진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집중한다면서 왜 동양화여야 할까. “화선지와 먹이 아니면 시간성과 공간성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작가의 대답이다.
지난 2년간 강의하는 틈틈이 새벽이든 한밤중이든 가리지 않고 그려낸 작품 90여 점 가운데 60여 점을 추렸다. “시간은 고무줄 같아서” 짬을 내는 게 어렵지 않았단다. 전시 제목 ‘끝없는 내일’은 희망을 습관처럼 내일로 미룬 채 남루한 일상을 사는 우리네 모습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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