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우뚝 솟았고 다른 하나는 직수굿이 앉았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 뒤편 레스토랑 두가헌(斗街軒·매우 아름다운 집) 뜰에 마주 선 수령 약 300년, 120년의 은행나무 모습이다. 1910년경 건립된 이 한옥은 고종의 상궁 출신 후궁 엄비(嚴妃)가 살던 곳으로 전해진다. 건축가 최욱 씨가 리모델링해 2004년 문을 열었다. 흙벽을 허물고 통유리로 감쌌지만 공간 얼개는 원형을 유지했다.
그러다 보니 주방이 협소하다. 천장도 낮아 환기가 만만찮다. 6.6m²에 불과하던 면적을 2010년 개조해 9.9m²로 넓혔지만 요리사 5명이 죽 늘어선 채 서로의 움직임을 배려하며 조심조심 작업해야 한다. 거기서 매일 점심 저녁 45석의 손님을 감당한다. 김대환 셰프(40)는 “디테일에 신경 쓰기가 쉽지 않은 여건이지만 10년 지나니 익숙해졌다. 새로 온 주방 멤버는 한결같이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당연히 내놓는 요리의 가짓수나 변화 폭이 크지 않다. 콩, 허브, 채소와 함께 약한 불로 6시간쯤 삶은 전복 가리비 전채와 한우 안심 스테이크가 코스메뉴의 흔들림 없는 골격이다. 박현진 대표(36)는 “다채로움보다는 질적 항상성에 치중한다. 안심 한 덩이(약 1.6kg)를 다듬으면 접시에 올리는 부위는 300∼400g 정도다. 나머지는 소스 재료 등으로 쓴다”고 했다.
스테이크는 무던하다. 기억에 남는 건 전채 소스다. 흰 접시 한복판에 두툼한 붓으로 한 획 갈라 긋듯 새까맣게 올렸다. 그 양쪽 구획에 전복과 가리비를 봉긋하게 돋웠다. 소금가루처럼 붙은 까만 것을 입에 넣으니 짜지 않고 새콤하다. 마늘조각, 빵가루, 오징어먹물의 조합이다. 대량으로 만들 때는 양파를 푹 삶아서 먹물 섞어 갈아낸 뒤 생선 육수와 백포도주를 첨가한다.
마침 갤러리현대에서 다음 달 14일까지 새까만 먹물 빛 전시가 열린다. ‘숯의 작가’로 불리는 이배 씨(58)의 개인전이다. 작가가 스스로 선택한 호칭은 아니다. 이 씨는 “1989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뒤 한동안 물감 살 돈이 없었다. 한 봉에 1500∼2000원 하던 데생용 목탄을 쥐고 다양한 표현을 고민한 결과물”이라고 했다. 2층에 걸린 7점은 바비큐용 잡목 숯 조각을 캔버스에 다닥다닥 올려붙인 뒤 아크릴물감용매를 여러 차례 바르고 표면을 사포로 다듬은 것이다. 붙이고 갈고 말리기를 한 달가량 거듭한다. 작가는 “벼루에 먹 가는 일과 같다”고 말했다.
최근작은 숯가루 섞은 아크릴물감용매로 굵직한 형태를 그린 뒤 다시 용매를 캔버스 전체에 덧씌워 바르고 말려 가는 붓으로 덧칠했다. 역시 한 달 정도 이 과정을 반복한다. 동양화의 여백 이미지를 차용한 듯하지만 사실 여백은 어디에도 없다. 반투명 용매 막으로 들이친 빛이 숯가루 칠 경계를 흩뜨려 먹물처럼 번져낸다. 이 씨는 “숯은 모든 사물의 마지막 모습처럼 보이지만 불을 머금고 있는 존재”라고 했다. 100년 전 두가헌에 살던 엄비의 아들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다. 공간 곳곳마다 검정 빛이 배어난다. 02-3210-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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