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초군(병사)끼리 서로 죽였으니 군법에 의해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하는 사안입니다. 신해룡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고 뭇사람에게 보여 군율(軍律)을 엄숙하게 바로잡는 게 어떻습니까?”(1643년 10월 21일)
인조 21년에 훈련도감이 기록한 업무일지 ‘훈국등록(訓局謄錄)’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당시 초병이던 신해룡이 동료 김진성을 조총으로 쏘아 죽인 일을 놓고 훈련도감이 수사를 벌인 기록이 자세히 적혀 있다. 신해룡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 실수로 조총에 불심지가 떨어져 오발탄이 발사됐다”고 해명했지만 훈련도감은 동료 병사들과 주변인 조사를 통해 ‘계획된 살인’으로 결론지었다.
신해룡이 사건 직후 김진성을 내버려두고 도망을 친 데다 평소 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병사들의 진술이 있었다. 또 수가 틀리면 신해룡 스스로 자해를 일삼는 등 성격이 포악했다는 증언까지 더해졌다. 일자마다 진술 내용이 자세히 적힌 훈국등록을 보고 있노라면 왜 이 책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조선시대 기록유산으로 꼽히는지 이해가 간다.
원창애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한중연 장서각이 20일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한국문화 스토리텔링의 보고 훈국등록’ 논문을 발표했다. 16∼19세기의 300년 동안 훈련도감의 업무내용을 매일 기록한 ‘훈국등록’은 총 94책에 달한다. 원 연구원은 “조총 살인사건에 나오는 여러 진술 내용을 통해 당시 병사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특히 어의(御醫) 이동형의 일가와 얽힌 뒷이야기(훈국등록 1705년 10월 6일)도 흥미를 끈다. 이동형은 현종의 핵환(核患·종기)을 치료해 2품관인 동지중추부사에 오른 인물이다. 이동형 사후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그의 아내와 아들은 훈련도감에서 은 300냥을 대출받았다. 군사기관인 훈련도감이 민간을 상대로 ‘이자놀이’를 한 셈이다.
빈털터리가 된 모자는 빚을 갚지 못해 관노비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이들의 딱한 사정은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약방 도제조로 있던 신완(申琓)이 숙종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숙종은 세자 시절 이동형이 자신의 병을 치료한 걸 기억해내고 빚을 모두 탕감해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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