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붉은 가을색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창을 배경으로, 약속 시간에 딱 맞춰, 팝스타 제이슨 므라즈(37)가 걸어 들어왔다. 오른손을 과장된 제스처로 내밀며 래퍼처럼 악수부터 청한 그는 보통 키(175cm)에 말랐지만 근육이 단단했고, 유달리 조막만 한 얼굴 위로 검은색 야구 모자를 오른쪽으로 15도쯤 비뚤게 쓰고 있었다. “어젯밤 늦게 입국해서 좀 피곤한데 기분은 아주 좋아요! 친구, 당신은?”
2005년부터 올해까지 네 장의 앨범을 빌보드 앨범차트 2∼5위에 올린 세계적인 팝스타는 갈색 체크무늬 남방을 평범한 청바지 위로 내 입었고, 겨우 세수만 한 얼굴이었다. 녹갈색 눈동자가 또렷한 그는 음정이 높고 약간 얇으며 허스키한 음성, 그러니까 ‘아임 유어스’(2008년)를 부를 때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뮤직비디오 유튜브 조회 수 1억9300만 건, 빌보드 싱글차트 100위권 최장기 등재 기록(76주간)을 6년간 지킨 노래 말이다.
한국 신문과 므라즈의 첫 대면 인터뷰였다. 21∼25일 대전, 대구, 서울 공연을 위해 방한한 므라즈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두고 70분간 가장 자주 언급한 동사는 ‘나누다(share)’, 형용사는 ‘창조적인(creative)’, 명사는 ‘정원사(gardener)’였다. 10년째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 시 북부 농업지역(노스카운티)에서 직접 아보카도 농장을 경영하며 채식을 하는 이 독신의 자연주의 뮤지션은 700만 장의 앨범, 1150만 개의 디지털 싱글을 팔고 그래미 트로피를 두 개 가진 스타이지만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햇살’을 묻는 질문에 아픈 기억이 떠오른 듯 고개를 숙이고 7초쯤 침묵하기도 했다.
―아보카도는 잘 자라나요? 왜 길러요?
“우리 농장 건 유기농이라 수확이 일렀어요. 사랑을 아주 많이 줬거든요.(웃음) 주변에 아보카도 나무가 많아서 저도 기르기 시작한 거예요. 대자연은 꽉 막힌 도시보다 음악 만드는 데 더 도움을 줘요. 절 엄청나게 창의적(super creative)으로 만들어주죠.” ―(2006년 이후 일곱 번째 내한인데) 한국말은 좀 해요?
“‘안녕하세요. 아임 제이슨 므라즈!’ 아, ‘감사합니다!’ (셔츠에 가린 왼 팔뚝을 가리키며) ‘생큐’란 말은 여기 (문신으로) 새겨져 있기도 하죠. 그 말은 15개 국어 이상 기억하는 것 같아요.(웃음)”
―기타는 몇 대나 갖고 있어요?
“모르겠어요. 어디 보자…. 이번엔 8대를 갖고 왔고, 집에 8대가 더 있고. 우쿨렐레는 4, 5대? 우리 동네에 우쿨렐레 가게가 정말 많아요. 우쿨렐레 모양 샹들리에도 있다니까요. ‘우쿨렐랜드’랄까.”
―(환경주의자에 자유인, DIY 이미지인 당신이) 왜 거대음반사(워너뮤직)와 일하죠?
“게으른 정원사(lazy gardener)니까요. 워너뮤직은 제게 정원사, 농부, 서핑 애호가로 지낼 시간을 더 많이 주거든요.(웃음)”
―1, 2집(2002, 2005년)에선 래퍼이자 로커로서 톡톡 튀는 재능을 보여줬는데 (‘아임 유어스’가 담긴) 3집부터 편안한 성인 지향 팝 스타일, 자연주의적 가사로 선회했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어릴 적) 숲(버지니아 주 메커닉스빌) 지대에 살다 콘크리트 정글로 왔잖아요. 샌디에이고 도심의 높은 인구밀도와 팝 컬처가 절 래퍼, 로커로 만든 것 같아요. ‘내가 춤추고 랩 하는 모습을 좀 봐봐!’ 식의 라이프스타일. 2집(2005년 ‘미스터 에이 투 지’) 만들 때쯤 북쪽 황무지(노스카운티)로 이사하면서 꽃과 열매가 만발한 환경이 음악에 영향을 줬어요.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 어쿠스틱 악기를 들고 우주의 하모니(universal harmony)를 노래하기 시작했죠.”
―(이렇게 들으면 한가해 보이는데 실은) 정말 바쁘잖아요. 1년에 콘서트를 몇 번이나 하죠?
“100∼150회 정도? 앨범과 앨범 사이에 휴식기도 몇 년씩 있으니까요, 뭐.” ―쓰고 있는 모자에 쓰여 있는 ‘라이프 롤스 온(인생은 계속 굴러간다)’은 뭐죠?
“(2011년 설립한 자선단체) ‘제이슨 므라즈 재단’이 후원하는 단체 중 하나예요. 척수외상을 지닌 어린이들이 서핑, 스키, 스노보드, 스케이트보드를 배우도록 도와주죠. 저도 가끔 아이들과 서핑하러 가요.”
―(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스트리밍 서비스인 ‘스포티파이’에서 자기 앨범을 전부 다 뺐잖아요, 싼값에 자기 음악을 들을 수 없도록. 이거 어떻게 생각해요?
“스위프트를 혁명가로 보진 않아요. 하나의 판촉 전략일 뿐이죠. 전 제 음악이 많이 공유됐으면 해요. 경력 초기에 작은 커피숍에서 공연할 때 얘긴데, 음반 살 돈 10달러가 없어 제 CD만 만지작거리는 관객한테 ‘슥’ (공짜로) 제 CD를 선물하곤 했어요. 절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제 음악에 쉽게 닿았으면 해요.”
―요즘 음반시장이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어떤 전략을 갖고 있나요?
“제 유일한 전략은 진정성(authenticity)이에요. 스위프트가 성공한 것도 자기 삶을 음악에 담는 진정성 덕이었죠. ‘늘 내 본모습을 지키자(Keep being myself)’가 제 신조예요.”
―신작 ‘예스!’로 첫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달성할 줄 알았는데 실패했어요. 코믹 가수 위어드 앨 얀코빅한테 밀렸죠.
“얀코빅! 어려서부터 광팬이었죠. 형이랑 그 사람 노래를 흉내 냈어요. 얀코빅의 1위가 정말 기뻐요. 제겐 기회도 더 있고요. 개인적으로도 친해요. 끝내주는 사람(great dude)이에요! 게다가 2위!(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들어 보이며) 이거 상징적이죠. 제 앨범이 5집인데 ‘V’는 로마숫자로 5. 함께 작업한 4인조 인디 밴드 ‘레이닝 제인’과 전 5명이고요. 게다가 이건 승리, 평화의 상징이잖아요!(웃음)”
―당신 음악을 들으면 빛나는 햇살 같은 이미지가 떠올라요. 혹시 살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햇살, 해맞이 같은 게 있었나요?
“(고개를 푹 숙이고 왼손으로 왼쪽 눈두덩을 비비며 ) 아아…. 있긴 있는데… 다른 것(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7초나 머뭇거리다) 오케이! 최고의 햇살은 이거였어요. 좀 이상한(weird) 얘긴데요. 4집(2012년 ‘러브 이스 어 포 레터 워드’) 만들 즈음 일이에요. 제 방에서 혼자 자는데 오전 5시쯤 전화가 왔어요. 요가 수업에서 딱 한 번 만났던 인도 여성이었는데, 자기 스승이 내게 전화를 해서 명상법을 가르쳐주라고 했다더군요. 홀린 듯 수화기를 넘어오는 지시에 따라 혼자 앉아 단전호흡과 명상을 시작했어요. 아침 햇살을 받은 감은 눈 안에서 여러 형태와 색깔이 흔들리더니 점차 큰 빛의 원 하나로 합쳐졌죠. 그때 문득 우리 존재에 대해 깨달았어요. 우린 어떤 일정한 속도나 비율로 진동하는데 삶의 속도를 늦추면 그 진동이 멎으면서 하나의 상, 우리의 본모습이 맺히는 거예요. 눈을 떴는데 빛의 잔상이 남아서 제 시선에 따라 제 손, 나무, 날 둘러싼 모든 것에 그 햇살 같은 게 투사되더군요. 그때 빛에 관한 노래를 많이 썼어요. ‘93 밀리언 마일스’ ‘아이 원트 기브 업’ ‘에브리싱 이스 사운드’…. 괴상한 이야기죠?”
―그러네요. 당신 노래 중에 스스로 제일 아끼는 건 뭐예요?
“‘93 밀리언 마일스.’ 아니다! 어떻게 여러 자식 중에 하나만 예뻐해요?(웃음)”
―그럼 최고 히트 곡에 대해 얘기해 보죠. ‘아임 유어스.’ 가사가 모호하던데, 어떤 메시지를 담은 거예요?
“신을 위해 쓴 곡이에요. 마음을 열고 자신을 놓고, 우주의 에너지가 저(므라즈)라는 악기를 통해 연주되도록 하고 싶었죠. 당시 여자친구에 대한 애정도 담겨 있지만, 요즘 그 노랠 부를 땐 본래 의도로 돌아가게 돼요.”
―종교가 있나요?
“아뇨. 어릴 땐 교회에 다녔는데 성경은 셰익스피어 희곡처럼 혼란스럽게만 느껴졌어요. 종교가 때로 힘의 비즈니스로 돌아가고 분열을 조장하는 데 실망도 했고요. 성전(聖戰)이란 게 왜 존재해야 하나요. 팔레스타인에서 슬픈 뉴스가 들리고….” ―‘므라즈’란 성이 특이해요. 체코 혈통이죠?
“네. 체코어로 ‘서리’란 뜻. 제가 좀 ‘쿨’한 걸 좋아해요.(웃음) 17세기 체코에서 유래했는데, 원래는 ‘므라직’인가 그랬대요. 조상들은 대대로 농부였죠. 저처럼.(웃음)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이 철자를 자꾸 틀려서 ‘미스터(mr) 에이지(az)!’라고 알려줬죠. 결국 2집 제목을 ‘미스터 에이 투 지’라 지었죠.”
―비틀스 멤버 중엔 누굴 젤 좋아해요?
“영화 ‘보이후드’ 봤어요? 멤버 각자 만든 노래는 별로였는데 넷이 뭉치면 최고였다는 내용. 동의해요. 사회운동가로선 존 레넌, 영적 투사로선 조지 해리슨,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 땐 링고(링고 스타)를 존경하죠.”
―당신을 닮고 싶어 하는 TV 오디션 참가자들이 많아요. 조언해줄 게 있나요?
“저처럼 되지 말고, 여러분 자신처럼 되세요. 우린 삶의 단계마다 독창적인 실화를 만들어가죠. 그렇게 쌓인 실화를 들려주며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야 하죠. 우상에 집착하는 건 창조를 방해하는 일이에요. 다른 사람이 밴드나 음악을 만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음악은 그 자체로 (당신에게) 보상이에요. 음악 그 자체보다 당신을 부유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건 없어요.”
―요즘에도 무명 때처럼 작은 커피숍에서 공연하나요?
“그럼요. 샌디에이고에서 가끔 가명으로요. 가게 이름은 알려줄 수 없어요. ‘아이 원트 기브 업’을 처음 부른 것도 ‘힐 스트리트 커피숍’ 오픈 마이크의 밤 행사에서였어요. 커피숍이 없었다면 저도, 수많은 뮤지션도 없었겠죠.”
―가수가 안 됐으면 뭐가 됐을까요?
“농부나 정원사나 조경사. 무명 때 제가 만든 데모 테이프를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잔디 깎는 기계를 운전하는 일을 하곤 했어요. 정치 풍자 만화가도 좀 되고 싶었죠.”
―부자죠?
“하하. …나쁘지 않은 정도? 소비에 집착하지 않고, 집도 샀고, 땅도 좀 있고…. 감사하죠.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추구한 것뿐이었는데….”
―집에 혼자 사나요?
“10년째 혼자 사니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더라고요.(웃음) 요즘엔 사람들을 많이 초대해요. ‘지저스’ ‘크리슈나’를 포함한 고양이 네 마리를 기르고요. 닭도 네 마리 길러요.(웃음)”
―꿈꾸던 대로 살고 있나요?
“(물 잔을 3초쯤 만지작거리며 내려보다) 내 꿈…. 집에 더 있는 것, 지금으로선. 서핑 실력도 늘리고. 농장 운영도 더 잘하는 것. 지역적으로 행동하고 사랑하되, 지구적으로 생각하기. 비행기 덜 타기….”
―내년엔 뭐 할 거예요?
“한 해 쉬려고요. 집에 주로 있으면서. 농업, 조경하는 틈틈이 다음 앨범 구상도 좀 하고요.”
―절친한 유명인 있어요?
“17년째 우리 집 소파에서 뭉개는, (웃음) 음악 친구 부시왈라(윌리엄 게일우드). 그리고 레이닝 제인. 함께 음악과 콘서트에 삶의 건강한 모습들을 투영해내고 싶어요.”
므라즈는 21일 대전무역전시관에서 공연한 데 이어 23일 대구 엑스코 컨벤션홀, 24∼2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선다(8만8000∼14만3000원. 1544-6399, 1544-1555). 공연 예정 시간은 180분이다.
그는 70분 전과 같은 큰 포즈의 악수와 미소로 작별을 고하고 다음 일정, TV 연예 프로그램과 뉴스 녹화를 위해 떠났다. 23일과 24일 방영된다. “안녕, 친구. 공연장에서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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