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북부 함부르크 항구 인근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운하. 발트 해와 북해를 잇는 98km 구간의 지름길로 연간 3만5000대의 배가 드나드는 중요한 수로다. 그런데 지난해 이 운하가 잠금장치 고장으로 2주간 문을 닫았고, 올해 9월에도 수문이 작동하지 않아 다시 폐쇄됐다. 제1, 2차 세계대전 중에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이는 독일 정부의 ‘균형예산’에 대한 절대적 신봉이 낳은 사고였다. 독일 정부는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재정위기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난 수십 년간 각종 사회간접자본 투자 예산을 뼈만 앙상하게 남을 정도로 삭감해 왔다. 2012년 운하 유지보수 비용은 연간 6000만 유로에서 1100만 유로로 삭감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운하 전면 보수에 10억 유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독일이 자랑하는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도 곳곳의 균열을 땜질하는 공사 때문에 실제 시속 100km로도 달릴 수 없는 구간이 많다. 2007년 문을 열 예정이던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국제공항(BER)’은 개장이 4번이나 연기돼 기약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독일경제연구소(DWI) 마르첼 프라처 소장(43)이 쓴 ‘독일의 환상(Die Deutschland-Illusion·사진)’은 유로존의 모범생인 독일의 경제모델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독일은 ‘절제와 검약’에 대한 과도한 숭배 때문에 투자하는 방법을 잊었고, 결국 몽유병 환자처럼 경기침체로 한발씩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프라처 소장은 독일이 세 가지 환상에 휩싸여 있다고 지적한다. 첫 번째는 지난 10년간 노동시장 개혁 덕분에 이룬 ‘취업률의 기적’이고, 두 번째는 경쟁력 있는 회사들로 인한 ‘수출 기적’, 세 번째는 연방정부의 ‘균형예산’이다. 그는 “독일인들이 독일이라는 차의 보닛을 열어 엔진도 들여다보지 않은 외국인들의 잘못된 아첨 발언에 현혹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독일의 환상을 하나하나 벗겨낸다. 취업률 기적은 대부분 ‘시간제 일자리’나 ‘불안정한 일자리’ 창출로 인한 것이다. 수출의 성공은 제품 경쟁력보다 임금 인상 억제를 통한 가격 경쟁력에서 기인한 부분이 크다. 독일의 경제모델은 중국을 비롯한 브릭스(BRICS) 국가에 자본재를 파는 것이 한계에 이르거나, 임금 압박을 통해 남유럽 국가들로부터 이익을 빼앗는 ‘제로섬 게임’을 더이상 할 수 없다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독일인은 유로존 회원국들이 독일의 호주머니만 털어가고 있으며, ‘유럽에 좋은 것은 독일에 나쁜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독일은 수출이 늘어난 만큼 수입을 늘리지 않아 이웃 국가들에 두통거리를 안겨왔다. 독일은 1990년대 초반 국내총생산(GDP)의 23%를 투자했으나 현재 17%만 투자를 한다. GDP 대비 정부의 총투자액도 유럽연합(EU) 28개국 평균보다 낮고, 그리스나 이탈리아보다도 적다.
프라처 소장은 독일이 ‘이웃을 거지로 만드는’ 경제모델을 전 유럽에 강요하는 것은 디플레이션 같은 큰 위험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