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조주 스님(778∼897)은 꽤 흥미로운 캐릭터의 선승입니다. 그가 남긴 일화와 화두는 중국 선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죠. ‘차나 마셔라’ 또는 ‘차나 마시고 가라’쯤으로 옮겨질 ‘끽다거(喫茶去)’가 그렇습니다.
알려진 대로 조주 선사는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온 사람에게 처음 왔냐고 물은 뒤 그렇다고 하니, “끽다거”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는 온 적이 있다고 했더니 이번에도 “끽다거”라 하죠. 그러자 절집 살림살이를 챙기는 원주(院主) 스님이 이를 지켜보다 “왜 똑같이 말하냐”고 묻습니다.
바로 이때 나온 답이 걸작입니다. 너도 “끽다거”죠. 귀찮으니 입 닥치고 차나 마시라는 의미는 아닌 것 같죠. 선종에서는 ‘조주끽다거’를 선 수행이 차 마시는 것처럼 늘 있는 일, 즉 다반사(茶飯事)로 이뤄져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스님은 차와 선을 하나로 꿰뚫은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24일 만난 원철 스님은 해인사 승가대학장으로 법정 스님의 뒤를 잇는 불교계의 대표적인 문장가로 꼽힙니다. 스님이 새로 낸 산문집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불광출판사·사진)에는 커피를 소재로 한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참선 중 졸음을 이겨내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난 달마 대사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눈꺼풀’을 잘라 던졌더니, 그 자리에서 차나무가 자랐다는 불교계 전설이죠. 원철 스님은 시대에 따라 제자들의 졸음 쫓는 찻잎이 커피로 바뀌었어도 이해해 달라고 하네요.
그러고 보니 올 4월 해인사를 찾았다가 원철 스님 숙소에서 커피를 한잔 마신 일도 있습니다. 전통차가 나오나 했더니 스님은 손으로 커피 가는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어 커피 한잔을 주더군요. 5년 전쯤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는 스님은 어느새 커피콩의 종류와 콩 볶는 온도, 향, 물맛에 따른 맛의 차이까지 언급하는 전문가가 됐습니다.
원철 스님에게 이런 질문도 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글 빚도 싫다며 자신의 책을 절판시켰는데 스님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인가요?”
“절집도 익숙해지면 매번 비슷한 생활로 이어져 직장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요. 제게 글쓰기는 숨 쉴 구멍이죠. 드러내기 위해 글을 쓰진 않지만 사람들과 너무 멀리 있어도 문제니 세상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에서 소통하는 방법이죠.”
부산 범어사 석공 스님의 커피도 빠지지 않습니다. 범어사 스님들 사이에 커피 열풍을 몰고 온 분이기도 하죠. 강릉 현덕사의 현종 스님은 커피 템플스테이 프로그램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조주 선사는 커피 맛을 알 수 없었겠죠? 하지만 커피, 녹차, 푸얼차(‘보이차’)면 어떻습니까. 요즘 절집의 변화에 스님은 다시 ‘끽다거’, 이러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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