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서울 용산구 삼성미술관 리움 인근에 간판 없는 조그만 식당 하나가 문을 열었다. ‘태국음식 파는 식당 같긴 한데….’ 창밖에서 얼추 분위기를 짐작하고 과감히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았던 손님 중 태반이 머쓱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똠얌꿍(태국식 수프)? 팔지 않습니다.”
똠얌꿍과 팟타이(태국식 볶음국수) 없는 태국음식점이라니. 주방장 겸 사장 송용성 씨(38)는 “내가 싫어해서 안 만들었다”고 했다. 2명이 나란히 서기도 빡빡한 주방 앞 홀에는 테이블 5개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인테리어는 흰 페인트칠이 전부였다.
서울대 미대 조소과 출신의 송 사장은 차별화된 재료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셜롯(적양파), 고추, 마늘, 심황(커리용 향신료)을 일일이 다지고 빻아 코코넛크림을 더해 수제 그린 커리를 만들었다. 겨울에는 20시간 삶은 소 볼살 찜과 으깬 녹두코코넛을 스페셜 메뉴로 냈다. 고고한 ‘품질 외길’의 결과는 어땠을까.
“전혀 안 먹혔죠. 건방지게 내가 만들고 싶은 것만 팔았으니까요. 손님이 먹고 싶어 하는 걸 내놓지 않고.”
6개월 만에 문 닫을 위기를 겪은 뒤 ‘스파이시 바이트’(070-4028-8011)라는 간판을 달고 실내를 아기자기하게 꾸몄다. 차림표에는 똠얌꿍과 팟타이를 넣었다. 수제 커리는 단념했다. 하지만 가게 벽 흑판에 적힌 스페셜 메뉴는 여전히 태국 전통음식이 아니다. 동남아와 중국 요리에 쓰는 향신료와 서구 요리 기술을 조합한 어떤 것. 깊이 없고 근본 없다 손가락질 받을 수 있지만 균형 잡힌 맛의 무언가가 이곳의 메인 메뉴다.
큰길 건너 리움의 메인 메뉴는 뭘까. 데이미언 허스트일까, 아이웨이웨이일까, 이우환일까. 아니면 건물을 설계한 장 누벨, 마리오 보타, 렘 콜하스의 희미한 흔적일까. 21일까지 열리는 개관 10주년 기념전 ‘교감’전은 서로 맞닿는 지점이 얼핏 전혀 없을 듯한 덩어리들을 억지스러운 기색 없이 이어 엮은 기획의 솜씨가 어떤 개별 작품보다 돋보이는 전시다.
송 사장은 2004년부터 10년간 호주에서 유럽과 태국 요리를 배웠다. 요리학교 졸업 후 주방을 경험한 시드니 ‘세일러스 타이’는 호주의 스타 태국요리 셰프 데이비드 톰프슨의 레스토랑이다. 도다리 한 마리를 통째로 튀겨낸 뒤 간장 설탕 식초 생강 마늘 고추 향신료를 섞은 소스를 졸여 얹은 접시가 12월의 스파이시 바이트 스페셜이다. 당도 낮은 화이트와인과 착 맞아떨어진다. 요리의 국적? 알게 뭔가. 문제는 오직 밸런스다.
15∼16세기 조선의 분청사기철화 어문 호(壺·보물 787호)는 리움 1전시실 3층에서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상을 마주보고 있다. 유유히 헤엄치는 이 물고기 그림을 튀긴 도다리 접시와 나란히 놓고 보는 것은 얕은 수의 저속한 불경일까. 리움이라는 공간의 미덕은 경계 흩뜨린 온갖 것을 잘 섞음으로써 낮춘 눈높이에 있다. 북적이는 주말 풍경은 그 밸런스의 유효함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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