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1일 일요일 맑음.
리처드 파커, 심령술사 그리고 나.
#137 리차드파커스 ‘Psychic’(2014년)
#1. “우리, 한강까지 걸어갈래요?”
긴 속눈썹을 소녀처럼 빠르게 깜빡이며 A가 말했다. 밤이었다. 서울 서대문 네거리쯤이었고, 여기서부터 얼마를 걸어야 한강 어귀에 닿을까, 짐작할 수 없었다. A의 청유는 밑도 끝도 없었다. 걷는 동안 동이 터버릴지 몰랐다. 난 얼떨결에 “그래”라고 했다. 아스팔트를 타고 쌀쌀한 공기가 따라왔고 한 발짝을 내디딜 때마다 밤의 서울도 흔들렸다.
#2. 리차드파커스는 신예 여자 R&B 가수고 한국 사람이다. 얼마 전 그가 낸 미니앨범을 재생했다. A가 딱딱한 망각을 뚫고 살아나왔다. 흐느적대는 첫 곡 ‘사이킥’. ‘아무 말이 없어도 어색함 없이/공기 중에 떠도는 생각을 읽을 수 있고/아무 계산 없이 그저 바라만 봐도/답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계산기’ 같은 남자를 향해 리차드파커스는 ‘유어 마이 사이킥(넌 내 심령술사)… 우리 시작해볼까/아임 유어 사이킥’ 하는 처연한 후렴구를 주문처럼 반복한다.
#3. 리차드파커스의 CD 표지에 있는 호랑이 인형은 ‘파이 이야기’에 나오는 배 위의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떠오르게 한다. 기이하게도 서구 역사나 전설에서 리처드 파커라는 동명이인은 수십에서 수백 년 간격으로 조난되거나 침몰하는 배 위에 나타났다. 오랜 조난 끝에 굶주림을 못 견뎌 동료를 잡아먹는 식인귀의 이름도 리처드 파커였다. 파커에 붙은 복수형 ‘s’는 자기 음악의 반복되는 비극성에 대한 경고인지 모른다. ‘리처드 파커’는 늘 침몰하는 사람의 이름이다.
#4. 여러 여자 R&B 가수들이 예리한 단검을 청자의 폐부에 화려한 놀림으로 찔러 넣듯 가뿐히 노래하는 반면, 리차드파커스의 목소리와 가창은 듣는 사람의 발걸음을 되레 깊게 빠뜨려 스스로 상처 입게 하는 질퍽한 진창처럼 검고 무겁다. 투박하다. ‘우리 오늘밤 한강을 걸을까/허락 없이 내 손을 잡아도 돼’를 네 번이나 반복하는 후반부가 깔아둔 허공에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썸’ 같은 설렘을 담은 가사는 어쩐지 비극적으로만 들린다. 가사 속의 둘, 잘 안될 것 같다. 여자도 그걸 잘 아는 것 같다. 근데 왜….
#5. A와 난 그날 밤 한강까지 걷지 못했다. 누가 먼저 손을 잡지도 않았다. 밤이 차가웠고 다리가 아팠다. 그날 이후 A와 난 조금 가까워졌다. 우린 결국 각자의 바다로 침몰했다. 우린 왜 늘 침몰하는가. 우리의 심령술사는 왜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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