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 숲… 파도… 고산 등반에 지친 몸과 마음 ‘치유의 3시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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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와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숲 길’]산악인 엄홍길 대장의 태안군 국사봉 해송길 9km

《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오른 세계적 산악인 엄홍길 대장(54·밀레 기술고문)의 미소는 늘 여유롭고 온화하다. 눈꼬리가 무섭게 올라가는 일이 없다. 숱하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간 사람답지 않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매사가 전투적이고 열정적이다. 밥 먹을 때도 그렇다. 왼손으로는 젓가락질을 하며 반찬을 집고,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숟가락을 들고 밥과 국을 부지런히 뜬다. 그가 식사할 때는 대화가 끼어들 틈이 없다. 오로지 먹는 데 집중한다. 당연히 일반인의 식사시간보다 곱절 빠르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고산 등반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이다. 밥 먹는 것도 산을 오르내리는 듯 긴박하다.》

하늘로 높이 솟은 해송숲 사이를 엄홍길 대장(앞)이 걷고 있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지만 엄 대장은 짙은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국사봉 해송길은 소나무숲과 바다 풍경이 어우러진 코스다. 태안=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하늘로 높이 솟은 해송숲 사이를 엄홍길 대장(앞)이 걷고 있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지만 엄 대장은 짙은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국사봉 해송길은 소나무숲과 바다 풍경이 어우러진 코스다. 태안=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소나무 향기에 열정이 솟다

16일 전국에 매서운 추위가 몰아닥친 새벽. 엄 대장은 가뿐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아일보와 아웃도어 브랜드 밀레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대한민국 명품 숲길 트레킹의 첫 주자로 나섰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일대 해변을 둘러싸고 있는 국사봉 해송길로 향했다.

국사봉(國師峰)은 예부터 마을 사람들이 가뭄과 질병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제(祭)를 지냈던 산을 일컫는다. 충남 서북부 해안가 여러 산에서 제를 지낸 전설이 전해져 온다. 이곳 국사봉(해발 220m)도 그중 하나다. 해안가를 끼고 도는 산길 주변에는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찼다. 아침인데도 소나무숲이 해를 가려 밤 같았다.

오전 10시. 트레킹 출발지인 소원면 의항해수욕장에 도착한 엄 대장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을 감았다. 엄 대장은 “소나무 향기가 진동한다”며 냄새를 맡았다. 세찬 눈보라와 바닷바람이 몰아쳤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엄 대장은 약 9km 거리의 트레킹을 재촉했다.

“요즘 나라가 시끄럽잖아요. 국민들은 먹고살기 힘든데, 정치는 이상한 ‘산’으로 가고…빨리 그 ‘산’으로부터 멀어지고 싶더라고요.”

의항해수욕장에서 국사봉으로 가는 길 초입에 있는 수망산은 제법 가팔랐다. 엄 대장이 등산용 스틱을 꺼내들었다. 엄 대장은 1998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해발 8091m) 4차 도전 당시 추락한 셰르파를 구하려다 함께 떨어져 오른쪽 무릎에서 발목까지 세 군데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대수술을 받았지만 시원치가 않았다. 여전히 발목을 잘 굽힐 수 없어 절뚝인다.

수망산 자락의 망산 고개(해발 140m) 인근에서 평탄한 길을 만났다. “아주 좋아!” 신이 난 엄 대장은 속도를 냈다. 갈대들이 사방에서 불어오는 눈보라에 넘어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오뚝이 묘기’를 펼쳤다. 절로 탄성이 나왔다.

“높은 산을 오를 때는 깜빡 조는 순간 죽을 수도 있죠. 하지만 이런 산행이라면 주변의 아름다움에 빠져 거의 잠에 취한 기분으로 다닐 수 있겠어요.”

엄 대장의 몸은 산과 맞서기 위해 단련됐다. 극한 상황이 되면 수면욕과 식욕을 이겨내는 체내 시스템이 작동한다. 엄 대장은 로프에 기대어 20∼30분을 자더라도 일반 사람이 3∼4시간 이상 자는 효과를 낸다. 엄 대장은 50대 중반 나이에 지난해 생애 처음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다. 등산에 최적화된 몸 구석구석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생사를 넘나들면서 얻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여전히 쌓여 있는 피로감은 어쩔 수 없다.

“황영조 씨(44·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팀 감독)하고 스포츠과학센터에서 회복력을 측정했는데 젖산 분해 능력이 일반인보다 훨씬 높게 나왔어요. 회복이 빠르다는 얘기죠. 그런데도 자연과 부닥치면서 쌓인 스트레스는 내 몸이 가진 회복력으로는 이겨내기 힘든 부분이죠.”

엄 대장은 트레킹을 통해 비로소 자연을 적이 아닌 동반자로 만나고 있다. 트레킹을 통해 산악 인생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조금씩 털어내고 있다. 이날도 엄 대장은 남은 스트레스를 풀어버릴 생각에 배고픔도 잊었다. 엄 대장은 “배낭에 먹을 거라곤 물 한 병이 전부예요. 새벽에 계란프라이만 간단하게 먹고 나왔는데도 포만감이 크다”며 웃었다.

○ ‘엄홍길’을 빼닮은 ‘홍(紅)길’

망산 고개에 이르니 눈보라가 내려앉은 땅이 물기로 촉촉했다. 그 위에 고명처럼 얹어진 솔방울과 낙엽을 흙과 함께 밟는 촉감이 스펀지 위를 걷는 듯했다. 붉은색 흙이 깔린 길은 그야말로 ‘홍(紅)길’이었다. 엄 대장은 매년 새해 첫날 산 위에서 붉은 태양을 보는 것을 즐긴다. 엄 대장의 눈가가 젖는 순간이다.

“붉은 덩어리가 솟아오르면서 눈 덮인 산이 황금색에서 벌겋게 변할 때는 정말 감동이죠. 그때 저는 눈물을 흘려요. ‘아∼세상에서 나는 아주 작은 존재일 뿐이구나’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새해에도 엄 대장은 장엄한 태양 앞에 서 있을 계획이다. 안나푸르나의 해발 3200m 기슭에 있는 푼힐 지역을 트레킹하며 일출을 볼 예정이다.

주변을 보니 태안반도의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숨 한 번 크게 쉬고 한 걸음 내디디니 경사가 급하지 않은 내리막길이다. 여유의 연속이야말로 국사봉 해송길 트레킹의 별미다.

○ 다시 못 볼 친구들이여


국사봉 정상 부근의 길은 탁 트여 있었다. 성인 10명이 나란히 손을 잡고 가도 공간이 남을 정도다. 오른쪽으로 백리포 해변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엄 대장에게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10명의 사람이 있다. 그는 10명이 나란히 걸어도 될 길에 혼자 서 있는 게 미안하고 쓸쓸하다고 했다. 엄 대장은 산을 오르면서 10명의 ‘동반자’를 잃었다. 엄 대장은 “6명은 대원이었고 4명이 셰르파였는데 그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엄 대장은 나지막이 ‘지현옥’을 되뇌었다. 지현옥 대장은 8000m급 한국 여성 등반시대를 연 산악인이다. 1999년 엄 대장은 다섯 번째 도전 만에 안나푸르나 등반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 지 대장은 안나푸르나에서 목숨을 잃었다.

“저는 정상에서 내려오고 지현옥은 셰르파와 정상을 향해 가던 중에 만났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죠. 지현옥이 정상에 있을 때 무전 교신을 했는데 그 이후에 내려오지 않더군요. 베이스캠프에서 얼마나 하염없이 기다렸는지 몰라요.”

하얀 날개를 휘저으며 구름사이로 떠오네
떠나 가버린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사라져 버린 그 사람
다시는 못 올 머나먼 길 떠나 갔다네.
한없이 넓은 가슴으로 온 세상을 사랑하다
날리는 낙엽 따라서 떠나가 버렸네
울어 봐도 오지 않네 불러 봐도 대답 없네
흙 속에서 영원히 잠이 들었네.


이명훈이 부른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이라는 곡은 엄 대장의 애창곡이다. 해송길 트레킹을 앞두고 지현옥에게 마음속으로 꼭 불러주고 싶었다고 했다. 남들 앞에서 부르기보다는 산에서 무심코 혼자 가사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날만큼은 바다와 소나무숲의 힘을 빌려 용기 내어 한 소절 불러보았다.

엄 대장의 산악인생에서는 환희와 회한이 교차했다. 네 번이나 좌절을 안겨준 안나푸르나를 다섯 번째 등반에 마침내 올랐지만 기쁨보다는 서러움이 컸다.

“결국에는 나를 받아줄 것이면서 그렇게 힘들게 했느냐고 반문했어요. 너무 울었죠. 서러움에….”

국사봉 해송길에 마련된 전망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은은하다. 태안=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국사봉 해송길에 마련된 전망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은은하다. 태안=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바다도 친숙한 ‘나의 길’


국사봉 정상에서 천리포의 파도 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파도가 이날 따라 유난히 요동을 쳤다. 엄 대장은 “파도 소리가 마치 설악산 바람 소리 같다”며 귀를 기울였다.

엄 대장에게 바다는 산만큼 친숙하다. 엄 대장은 해군 특수전전단(UDT) 28기 출신이다. 1996년에는 한 방송사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포항에서 독도까지 5박 6일간 헤엄친 적도 있다. 바다에서 미래를 꿈꾸었으면서도, 바다가 무서워 두려움에 떨어본 경험이 있는 그다. 그는 산만큼 바다를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한다. 엄 대장의 시선은 천리포 옆 만리포 해변가로 향했다.

“그 노래 아세요? 만리포 사랑.”

엄 대장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의정부에서 기차를 타고 만리포해수욕장을 찾았던 그때로 잠시 돌아갔다.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사랑….’(만리포 사랑·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이번 트레킹은 엄 대장에게 걷기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바다에 대한 추억도 함께 되살려 주었다.

고산 등반 뒤에 엄 대장은 고통에 시달리고는 했다. 체중이 10kg 이상 빠지고 동상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나 이날 소나무숲과 파도를 보며 트레킹을 마친 엄 대장의 모습은 고통이 아닌 희망으로 빛났다.

“2015년, 예감이 좋아.”

엄 대장은 다가올 새해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국사봉 해송길은 : :

푸른 수평선을 배경으로 늘어선 해송 사이를 걷는 트레킹 코스. 충남 태안군 의항해수욕장에서 망산고개 백리포를 지나 천리포해수욕장, 국사봉, 만리포해수욕장에 이르는 약 9km의 코스다. 약 3시간 소요. 향기 짙은 소나무 숲길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풍경이 멋지다. 인근에 천리포수목원이 있다.


▼ 양발 11자로… 허리는 곧게 펴고 발 뒤꿈치부터 땅에 닿게 ▼


○ 올바른 걷기 방법

특별한 운동기구나 사전 준비 없이 가장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는 운동이 바로 걷기다. 특히 경사가 완만한 숲길에서 즐기는 트레킹은 다리 관절에 가해지는 부담이 적어 초보자도 쉽게 도전할 수 있다.

걷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잘못된 걸음걸이로 관절과 근육에 무리가 올 수 있다. 오랜 시간을 걷는 트레킹이라면 자세 교정을 먼저 받는 것이 필요하다. 시선은 전방 15m에 두고 허리는 곧게 펴고 걷는다. 뒤꿈치부터 발바닥 전체, 발끝 순서로 걷는다. 보폭은 키에서 100cm를 뺀 너비로 걷는 것이 적당하다. 양발은 ‘11자’를 유지해 안쪽이나 바깥쪽으로 휘지 않도록 한다. 두 팔은 앞뒤로 자연스럽게 흔들고 오르막을 오를 때는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면서 보폭을 작게 내딛는다.

내리막길에서는 관절에 가해지는 충격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 무릎을 펴고 내려가다가는 자신의 체중이 그대로 관절과 근육에 전해져 연골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무릎을 많이 굽히고 무게중심을 낮춰 천천히 걷는다.

신발 밑창이 지나치게 얇으면 바닥의 충격이 쉽게 몸으로 전해진다. 적절한 충격 흡수 기능을 갖춘 트레킹 전문 운동화를 선택하는 것이 필수다. 또 울퉁불퉁한 돌길처럼 거친 지면을 걸을 때는 발의 충격을 흡수하고 발목을 지지해줄 수 있는 제품을 선택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발목 보호대를 차는 것도 좋다. 본격적인 트레킹 전에는 스트레칭이나 간단한 체조로 몸을 가볍게 풀어주며 땀을 조금 흘리는 게 낫다.

밀레 용품기획부 송선근 차장은 “눈비 등으로 미끄러운 겨울에 트레킹을 할 때는 발이 헛돌지 않도록 접지력이 좋은 밑창의 운동화를 선택해 안전성을 높이고 방수 기능이 있는 소재의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태안=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솔 숲#국사봉#해송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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