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섭 전문기자의 바둑人]<25> 일요일엔 바둑 안둔다는 모태신앙 女9단, 기업 CEO 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9일 11시 16분


조혜연 9단은 바쁘다. 대학원에 다니랴, 국가대표 상비군 훈련을 받으랴, 바둑 영어책 만드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다. 여기에 최근에는 ‘더 바둑’ 대표이사로 최고경영자(CEO)로도 나섰다. 한국기원 제공
조혜연 9단은 바쁘다. 대학원에 다니랴, 국가대표 상비군 훈련을 받으랴, 바둑 영어책 만드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다. 여기에 최근에는 ‘더 바둑’ 대표이사로 최고경영자(CEO)로도 나섰다. 한국기원 제공

바둑계에서는 드물게 대졸, 그것도 고려대 영문과를 나온 수재. 여성 바둑계의 정상권에 있을 때 종교 때문에 일요일에 바둑을 둘 수 없다고 해서 바둑계를 시끄럽게 한 조혜연 9단(30). 그런 그가 최근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됐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마침 국수전 도전1국 부대행사(포스코 지원)로 열린 다면기 참가차 전남 순천시 상사면 승주CC를 찾은 조 9단을 7일 오전 만났다. 최종태 포스코경영연구소 상임고문과 박치문 한국기원 부총재 등과 조찬 모임을 가진 직후였다.

―회사를 차렸다는데 어떤 회사인가.


“주식회사 ‘더 바둑(The Baduk)’이다. 각자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주주 4명을 모셨고 내가 대표이사를 맡았다. 한 달 전 법인등기도 마쳤다. 한마디로 바둑 콘텐츠를 생산 유통하고 바둑 글로벌화를 목표로 하는 기업이라고 보면 된다. 개인적으로 바둑 보급을 하면서 느낀 부족한 점들을 보완해보고 싶었다. 마침 기회가 닿았다.”

―구체적인 수익 모델은 무언가.


“바둑 콘텐츠를 담은 앱(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데 주력할 것이다. 도서 출간, 이벤트 등도 함께 할 생각이다. 우선 바둑 앱은 200개를 목표로 삼고 있다. 개발은 주주 중의 한 분이 운영하는 ‘유비누리’에서 맡는다. 바둑 글로벌화를 지향하는 만큼 영어와 중국어도 병용할 계획이다. 앱은 입문자를 위한 교재, 사활문제를 비롯한 바둑이론 등 다양하게 구상하고 있다. 타깃 층을 나눠 접근할 생각이다. 예컨대 기존 바둑애호가들에게는 자료 중심의 앱을, 드라마 미생을 보고 바둑을 배우고 싶어 하는 잠재적 대중을 위해서는 입문 자료나 13줄바둑과 같은 앱을 만들어 제공하는 식이다. 앱은 점차 유료화할 계획이다.”

―주변과의 협력이 필수적일 것 같은데….

“맞다. 나는 이 사업을 바둑계 파이를 늘려가는 상생의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컨대 현재 충무로에서 여자 프로기사들이 운영하는 ‘꽃보다 바둑센터’도 온라인에 바둑 앱을 만들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서로 윈윈할 수 있지 않을까. 프로 기사 개개인이 모두가 앱을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바둑의 외연이 넓어지면서 파이가 커질 것이라고 본다. 궁극적으로는 바둑계 플랫폼으로 키워가고 싶다.”

―현재 직원도 없다고 들었는데, 이 많은 일이 가능하겠나.


“우선은 혼자 해나갈 생각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바둑 보급 활동을 해온 게 도움이 되고 있다. 창작사활과 현현기경, 관자보 등을 영어로 번역한 책이 있다. 또 주한미군과 군부대 보급 활동 자료도 축적돼 있다. 1주일에 한 번꼴로 주한미군에서 1년 9개월 동안 바둑 강의를 했다. 모두 85차례 강의 교재를 영어로 만들었다. 바둑판도 모르는 주한 미군들에게 바둑을 이해시키고 가르치는 게 쉽지 않았다. 한국 사람은 바둑은 둘 줄 몰라도 바둑판이 뭐고, 흑백이 번갈아 둬 집이 많은 사람이 이긴다는 개념 정도는 알고 있다. 백지상태인 외국인들에게 집의 개념과 두터움, 실리 등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이들이 잘 모르는 부분을 대화를 통해 보완해가며 교재를 만들어왔다. 40명 정도를 바둑에 입문시켰다. 또 한국 특전사 군인들을 대상으로 바둑을 가르친 경험도 도움이 될 것이다.”

조혜연 9단이 주한미군에게 바둑을 가르쳐 주는 모습.  한국기원 제공
조혜연 9단이 주한미군에게 바둑을 가르쳐 주는 모습. 한국기원 제공

조혜연은 ‘더 바둑’ CEO로서 지난해 12월 말 첫 행사를 기획했고, 성공리에 마쳤다. 한국기원 지하에서 ‘송년 외국인 바둑파티’를 열었다. 한국거주 외국인들에게 바둑대회를 경험하게 해줬다. 5월에 있을 두 번째 행사 때는 대학로에서 좀더 크게 열 계획이다. 이 오프라인 행사를 위해 그는 온라인 앱을 만들어 홍보했다.

온라인 앱 아이디어는 그가 페이스북에 운영 중인 그룹 방 ‘스피릿 오브 바둑(Spirits of Baduk)’에서 따왔다. 전 세계를 상대로 바둑을 홍보하거나 궁금한 것, 각종 이야기를 올리는 그룹 방이다. 바둑 이외의 자료는 방장인 그가 삭제한다. 현재 회원은 2369명.

‘더 바둑’은 그가 다음 카페 ‘아키라의 바둑’과 영문 블로그인 ‘라이브 저널’ 등을 운영했던 경험이 바탕이 됐다. ‘아키라’는 일본 만화 ‘고스트 바둑왕’에 나오는 조연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한때 회원이 2만 명이나 됐다.

조혜연은 CEO 역할 말고도 대학원 공부, 국가대표 상비군, 여자바둑리그 포스코켐텍 선수 등으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현재 고려대 언론대학원 3학기를 마쳤다. 4학기 종합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또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바둑 훈련을 받을 때 나온 최신 정석 등을 정리한 ‘국가대표연구회 리포트①’도 책으로 만들어냈다. 6개월마다 한 권씩을 내겠다는 게 그의 목표.

조혜연이 처음 바둑을 배운 것은 7세 때. 수원의 바둑교실에서였다. 기재가 있어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97년 4월 프로가 됐다. 그때 나이 11세 11개월.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에 이은 역대 3위의 최연소 입단기록이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덤덤했다. 늦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마추어 전국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입단대회에서 2번이나 떨어진 끝이라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선배들한테 ‘누굴 놀리느냐’며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웃음).”

그의 바둑 스타일은 한마디로 야전형이다. 서봉수 9단에 가까운 스타일.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정규 바둑수업을 받지 않고, 당시 천리안에서 재야의 바둑 고수들에게 실전 바둑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입단 6개월 만에 운명적으로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을 만났다. 첫 판에서 그에게 처참하게 깨졌다. 이후 그는 정상권에 있으면서도 루이에게 막혀 13차례나 준우승에 머물렀다. 조혜연은 “눈앞의 벽을 어떻게 넘을까, 극복하는 방법을 찾지 못해 괴로웠다. 하지만 루이 때문에 내 바둑도 성장할 수 있었다. 내 바둑이 해이해지는 것을 막아준 소금이었다. 여하튼 그를 상대로 2차례 타이틀을 따냈다”고 말했다. 그는 “루이 사범은 바둑을 두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나타났다. 정식 대회가 아니라 연구 모임의 자체 리그에도 꼬박꼬박 나와서 어린 프로들과 바둑을 뒀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고, 나이도 상관하지 않았다. 40대가 넘어서도 바둑 그 자체를 좋아한 진정한 바둑인이며 승부사”라고 했다. 루이는 53세인 요즘도 중국 국가대표로서 어린 후배들과 훈련을 하고 있다.

조혜연이 대학을 가기로 결심한 것도 루이가 일조한 부분이 있다. 그는 루이에게 잇달아 패배하면서 그 아픔을 딴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일반 전형으로 당당히 고려대 영문과에 합격했다. 캠퍼스 시절 그는 영어에 매진했다. 영어회화를 마스터하기 위해 CNN 듣기는 물론 짐 캐리의 속사포 같은 말이 나오는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Bruce Almighty)’를 거의 통째로 외우다시피 하기도 했다. 그런 노력이 오늘날 그가 ‘영어바둑 전도사’가 되는 밑바탕이 됐다. 그는 지금도 고려대 기우회 YB 20여 명, OB 200여 명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고려대를 나온 바둑기사로는 심종식 한철균 김명완 안달훈 하호정이 있다.

조혜연 9단이 가수 추두엽과 바둑 콘서트를 하고 있는 모습. 한국기원 제공
조혜연 9단이 가수 추두엽과 바둑 콘서트를 하고 있는 모습. 한국기원 제공

그에게 가장 껄끄러운 질문을 했다. 일요일에 바둑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문제다. 그는 정상권에 있을 때 일요일에는 바둑을 둘 수 없다며 중국과의 단체전 멤버로 가는 것을 거부해 바둑 팬들로부터도 욕을 많이 먹었다. 마음의 상처도 깊었던 듯하다.

“모태 신앙이다. 하지만 중 3까지는 진짜 신앙은 아니었다. 그 무렵 결단의 시점에 서 있었다. 고민 끝에 ‘일요일에는 바둑 대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한참 뜸을 들였다) 나 말고 다른 신자(信者) 기사는 일요일에도 바둑을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이미 나는 원칙을 선언했고, 그것을 깨면 내가 바뀔까 두렵다. 내 자신을 잃을 것 같아 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원칙을 깨면 내가 바둑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그는 여자바둑리그 포스코켐텍의 선수로 뽑혔는데, 일요일에는 출전하지 않기로 양해가 됐다.

그에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었다.

“하는 일이 점차 많아지면서 역설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점점 좁혀지고 있다. 한마디로 승부를 하고 싶다. 선배들은 이런 나의 마음이 모순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적 차원으로만 말하는 게 아니라 어디인지 모르지만 바둑의 극점에 도달해 바둑을 알고 싶다. 루이 사범이 추구하는 것처럼 바둑이 친구나 직업 이상의 그 무엇이 됐으면 한다.”

그는 애인이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며 “나와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도 승부(勝負)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그는 꿈꾸는 솔로였다. 그렇지만 바쁘고 활달했다.

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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