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이르기를 ‘경들이 나의 본래 체질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나는 본래 성질이 따뜻한 약을 먹지 못한다. (중략) 평소에도 경옥고(瓊玉膏)를 한번 먹고 나면 5, 6일 동안은 음식을 먹지 못했다. 생맥산(生脈散)이 어쩌면 경옥고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니 이시수가 ‘그러하시다면 생맥산을 지어 들이는 것도 좋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나는 ‘(몸이 아파) 서로 대화하기도 어렵다. 경옥고를 먹을지 생맥산을 먹을지 하교를 기다리라’고 말했다.” (1800년 양력 8월 16일) 정조는 신하들과 이 대화를 나누고 이틀 뒤 세상을 떠났다. 》
그해 8월 중순부터 종기를 심하게 앓은 정조는 며칠째 음식을 넘기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다. 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먹을 약제를 의원들과 일일이 토론했다. 정조는 몸에 열이 많은 자신의 체질을 감안해 인삼이 들어가는 경옥고 사용을 꺼렸다. 유학 경전은 물론 한의학에도 능통했던 ‘학자 군주’ 정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이 16년 만에 ‘일성록(日省錄·사진)’의 정조 재위 기록에 대한 번역을 최근 마쳤다. 이 시기의 기록은 일성록 전체 분량의 40%를 차지한다. 일성록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국가기록물 중 하나다.
정조는 왕의 사후에나 공개되는 실록과 달리 국정 진행 상황을 곧바로 파악하고 반성할 목적으로 세손 시절이던 1752년(영조 28년) 일성록을 만들었다. 이후 일성록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까지 158년에 걸쳐 꾸준히 기록됐다. 정조의 마지막 사흘이 담긴 고전번역원의 일성록 국역본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정조는 마지막까지 병상에서 업무보고를 챙기며 국정에 매진했다. 서거 하루 전인 1800년 8월 17일 그는 “도목정사(都目政事·정기 인사)가 임박했는데 정관(政官)의 일이 딱하게 되었다. 민사(民事)에 관련된 일이 있으면 비록 지금 같은 상황에서라도 낱낱이 내게 물어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민본 행정을 최우선시한 정조의 국정 철학이 읽힌다.
일성록은 왕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됐다는 점에서 사관이나 승지가 쓴 실록, 승정원일기에 비해 왕의 통치 철학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 승정원을 거치지 않는 지방관의 장계(狀啓·보고서)나 암행어사의 서계(書啓) 전문을 수록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내용도 실록에 비해 훨씬 자세하다. 예컨대 정조 때 흉년을 맞아 전국에서 진휼(식량 구호 제도)을 실시한 것과 관련해 일성록은 곡식을 지역별로 얼마나 배포했는지는 물론이고 고을마다 굶주린 사람이 몇 명이었으며 재원은 누가 마련했는지 등을 세세하게 적고 있다. 반면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는 소요된 재원 등만 요약된 수치로 제시하고 있다.
일성록 번역은 고전번역원이 촉탁한 외부 번역위원 11명과 직원 2명이 이뤄 낸 성과다. 이 중 1년에 원고지 3600장 분량의 살인적인 번역 작업을 감당한 김성재 번역위원(58)은 2004년부터 일성록 번역에 매달렸다. 그는 ‘이날 유시(酉時·오후 5∼7시)에 상(정조)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는 15자의 원문 번역을 마치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 컴퓨터 앞을 잠시 떠나 있어야만 했다.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초 종기 제거 수술을 받으면서 종기로 숨을 거둔 정조를 내내 떠올렸다고 했다.
김 위원이 10년을 마주한 인간 정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굉장히 명민하면서도 정서적으로 불안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관련된 국면에서 감정 기복이 특히 심했다. 김 위원은 “어렸을 적 아버지의 충격적인 죽음이 트라우마로 남았던 것 같다”며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오회연교(五晦筵敎·오월 그믐 경연장에서 지시) 때 작심하고 신하들에게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도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감정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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