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즘(ism)’ 붙은 단어는 타자(他者)의 움직임에 방향성을 부여하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하지만 다다이즘과 아나키즘 연구에 주력해 온 캐나다 미술사학자의 이 저서에서 학술서 이상의 의도를 찾기는 어렵다.
출간 8년 뒤 이뤄진 한국어 번역 결과물에서는 옮긴이가 부여한 시대성이 희미하게 읽힌다. 그리스어 ‘anarkhia’에서 온 ‘아나키’는 ‘권위적 지배가 없는 상태’를 뜻한다. 역자는 책 말미 닫는 글에 미국 시인 로버트 덩컨의 글을 콕 집어 다시 인용하며 자신의 시각을 얹었다.
“집단의 비인간성에 맞선 싸움은 바로 다음 국면에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인간적인 힘은 압도적이지만, 누군가의 계속된 저항은 다른 질서를 만든다.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열망하는 모든 이에게 강한 힘을 보탠다. 지금은 그처럼 부술 수 없어 보이는 족쇄를 마침내 부술 수 있는 힘.”
저자는 19세기 말 미국의 상업 미술에 대해 “검열관이 존중할 만하다고 여기는 경계 안에 확고히 머무르면서도 상품으로 팔릴 수 있도록 주의 깊게 조정됐다”고 썼다.
“황제와 귀부인들을 위한 장식품을 만드느라 정신없이 바쁜 작가들은 그들의 예술적 비전에서 초점을 잃은 것”이라고 한 옛 소련 조각가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말을 중요한 화두로 인용했다. 현상에 적용하면 덧없이 시간만 흘렀음을 돌이키게 하는 옛말이다.
옮긴이의 의도보다는 저자가 7장을 마무리한 문장에서 이 책을 지금 읽는 의미를 찾고 싶다.
“동시대 이슈와 관련된 미술 작업이 내일의 쓰레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경험에 의해 입증됐다. 예술을, 담론의 일부로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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