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칼날이 마치 나뭇가지처럼 뻗어 오른 ‘칠지도(七支刀)’는 서기 369년 백제를 떠나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쇳물을 틀에 부어 굳히는 주조 방식이 아니라 달궈진 덩이쇠(鐵鋌)를 망치로 두드리고 담금질하는 ‘단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칠지도처럼 복잡한 모양을 단조로 제작하는 것은 현대 기술력으로도 쉽지 않다. 게다가 단단한 철검 앞뒷면에 글자를 새긴 뒤 금실을 박아 넣기까지 했다.
금으로 새긴 61자의 세련된 글씨는 “백제 왕세자 근구수(근초고왕의 아들)가 온갖 병난을 물리칠 수 있는 칠지도를 만들었다. 후왕에게 주기 적합하므로 왜왕에게 보내니 후세에 전하도록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두고 백제가 왜에 칠지도를 ‘하사’한 것인지 ‘헌상’한 것인지, 혹은 동등하게 주고받은 것인지 해석이 분분하다. 하지만 백제 왕세자와 왜왕이 대등한 입장으로 묘사된 점을 미뤄볼 때 백제왕의 위상이 왜왕보다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왕을 후왕(侯王·제후왕)이라 부른 점에서도 백제가 왜에게 검을 하사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칠지도는 문화의 힘으로 국가의 입지를 다진 ‘문화강국’ 백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366년 왜의 사신이 처음 백제를 찾았을 때 근초고왕은 군사 퍼레이드를 선보이는 식으로 국력을 과시하지 않았다. 그 대신 보물창고를 열어 온갖 진귀한 물품을 보여주면서 “우리나라에는 이런 물건들이 많다”고 귀띔해주고 오색 빛깔의 비단, 쇠뿔과 힘줄로 만든 활, 덩이쇠 등의 귀한 선물을 보냈다. 당시 제철기술조차 보유하지 못한 왜는 여태 접하지 못한 뛰어난 문물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이듬해 왜에 파견된 백제의 사신이 들고 간 선물에 대해 왜왕이 “신라 것에 비해 훨씬 대단하다”고 감탄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
문화의 신세계를 접한 왜가 본격적인 교류를 위해 백제에 ‘러브콜’을 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칠지도와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공예품부터 말을 기르는 기술, 직조기술, 제철기술, 한자, 율령, 유학, 불교, 도교, 기술자에 이르기까지 백제는 자신들의 고급문화 전반을 왜에 전수했다.
그러나 백제의 문화 퍼주기는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왜는 369년 근초고왕의 요청에 따라 지원군을 파병한 것을 시작으로 백제가 요청할 때마다 군사를 보내줬다.
고구려나 중국 같은 군사대국과 마주한 백제가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선진문화를 매개로 왜와 가야, 신라 등 주변국들로부터 군사협력을 이끌어 낸 덕분이었다. 특히 백제의 문물에 열광했던 왜는 꾸준히 ‘친(親)백제’ 기조를 유지했는데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백제 부흥군에 지원군을 보내는가 하면 많은 백제 유민들을 받아들여 일본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문화로 맺어진 백제와 왜의 돈독한 관계는 날로 경색되는 최근 한일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1970년대 미국과 중국 간 핑퐁외교가 그러했듯 문화는 국가 간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 행태에는 단호히 대응해야 마땅하지만 동시에 문화적 접근은 언제나 열어 둬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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