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대 국수 오른 박정환
포석 수읽기 끝내기 두루 강해, 14개월째 한국 랭킹1위 지켜
“색깔이 장점되지만 단점 작용도…일부러 특별한 기풍 안만들어
세력보다는 실리를 좋아하고, 싸워야할 때는 피하지 않아
패배땐 영화보며 스트레스 풀어”
후지사와 슈코(藤澤秀幸) 9단의 바둑은 두터우면서도 화려했다. 보통 두터우면 발이 느리게 마련인데 그런데도 멋있었다. 반면 조훈현 9단은 행마가 경쾌하고 날랬다. 이창호 9단은 느린 듯하면서 정밀했다. 이세돌 9단은 불리할 때면 국면을 흔들어 상대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장기가 있다. 이렇듯 한 세대를 풍미한 1인자에겐 그를 특징지을 무언가가 있다.
그런데 박정환 9단(22)은 다르다.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포석과 수읽기, 형세판단과 끝내기에 두루 강하다보니 어느 것 하나 특출하게 도드라지지 않아서다. 그런데 어찌 보면 그게 강점이다. 숱한 고수를 제치고 14개월째 한국 랭킹 1위를 지키고 있다.
박정환은 14일 한국바둑의 계보를 잇는 국수(國手)에 올랐다. 그는 이날 국수전(기아자동차 후원) 도전 4국에서 조한승 9단을 이겼다. 그리고 58기 국수전 사상 13번째 국수가 됐다. 그와 나눈 이야기는 이렇다. 현장 인터뷰와 19일 전화통화를 정리한 것이다.
먼저 자신의 바둑에 대해 물었다. 강한 이유가 있을 법했다.
“색깔이 없다는 평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사실 특별한 기풍은 없다. 장면 장면마다 한 수 한 수 최선을 다해 노력할 뿐이다. 색깔이 있다는 게 장점도 되지만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본다. 스타일이 확고하면 상대가 대비하기에 더 쉽다. 나는 특별히 기풍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일부러 그러는 측면도 있다.”
틀을 만들면 얽매이게 되고 얽매이다 보면 도식적일 수 있으니 그걸 경계한다는 의미다. 골이 좁으면 빠르게, 골이 넓으면 느리게 흐르는 물처럼 상황에 따라 바둑을 구사하겠다는 말로도 들렸다.
박정환은 “세력보다는 실리를 좋아하고 먼저 싸움을 걸진 않지만 꼭 싸워야할 때 역시 피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게 스타일이라면 스타일이다. 그는 자신의 강점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했는데 거듭 묻자 마지못해 이렇게 답했다. “포석이 다른 부분보다 좀 나은 편이다. 되도록 전체를 보려 하고 두세 가지 수를 추려 놓고 나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국수전 우승 뒤 “입단할 때부터 꼭 따고 싶었던 타이틀이어서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조 사범이 국수를 3연패할 정도로 균형감이 좋아 우승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면서 “다행히 바둑이 잘 풀렸다”고 덧붙였다. 그는 1국에서 이긴 뒤 “4국에서 끝날 것 같다”고 듣기에 따라선 다소 건방져 보일 수 있는 말도 했는데 “그건 5국까지 가면 질 것 같아 4국쯤에서 승부를 내고 싶었다는 뜻”이라고 해명했다.
그러고는 “올해는 큰 승부에서 성적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세계대회의 중요한 승부에서 종종 패해 ‘국내용’이라고 들어온 비판을 의식한 말로 들렸다. 2월에는 김지석 9단과 LG배 결승전에서 맞붙는데 “평소처럼 준비할 생각이다. 체력도 보강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환은 바둑계에서 ‘공부벌레’로 통한다. 대회 때도 사활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는데 사활공부가 도움이 된다는 평소 그의 지론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는 바둑 국가대표로 거의 매일 상비군 훈련에도 참가한다. 그런 후엔 인근 왕십리에 있는 연구실로 향한다. 나현 김세동 김현찬 박진솔 조인선(입대) 등과 함께 공부하는 곳이다. 이들은 대부분이 양재호 도장 출신의 프로. 애초에 연구실은 집 근처 이수역 부근에 두었는데 최근에 기원 근처로 옮겨왔다. 사무실 운영비는 공동으로 내고 있다.
집에서도 그는 그날그날의 중요 대국을 꼭 챙겨본다. 인터넷 바둑도 즐긴다. “중국의 천야오예 판팅위 커제 등과는 각각 100~200판 정도 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판팅위는 실리를 좋아하고 타개를 잘해 공격하다 망한 경우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제한시간 20초’인 초속기 인터넷 바둑은 주로 감각에 의존해 두게 된다고 말했다.
그가 바둑을 배운 것은 여섯 살 때. 본격 수업은 1년 후 권갑용 바둑도장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그는 강동윤 김지석과 함께 배웠다. 첫 우승은 입단 이듬해인 2007년 엠게임 마스터스 챔피언십. 2010년 광저우(廣州)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2관왕(페어·단체전)에 올랐다. 병역특례 혜택은 그 공으로 주어졌다. 2011년 후지쓰 배에선 대회 최연소로 우승했는데 그 때를 그는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꼽았다. 지금까지 우승은 모두 14차례.
그는 패배했을 때 다른 프로들보다 더 괴로워하는 편이라고 했다. “작은 승부라도 지면 실수한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복기할 사람이 있으면 함께 패인과 문제점을 찾기도 하지만 복기조차 하기 싫을 때도 있다. 그런 때는 영화를 보거나 집 주위를 한참 동안 걸으며 스트레스를 푼다.”
영화감상은 산책과 더불어 그의 취미이기도 하다.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는데 최근 본 재미있는 영화로는 ‘국제시장’을 꼽았다. 산책은 그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수단. 집 부근에서 한두 시간 정도 걷다보면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다고 한다. 걷다보면 나이든 분 가운데는 어쩌다 알아보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아주 드물어 편하게 산책할 수 있다고 한다. 승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술은 피한다.
“‘어렸을 때’는 도장의 형들과 술을 먹기도 했다. 많을 때는 소주 한 병 반까지 마시기도 했다. 요즘은 어쩌다 가볍게 맥주를 마시는 정도다.”
체력관리를 위해서는 헬스클럽에 나간다.
그의 가족은 바둑을 잘 모른다. 12세 터울의 형은 배우다 말았고 열 살 위 누나는 두지 않는다. 그에게 바둑을 가르쳐준 아버지는 처음엔 호선이었으나 9점을 깔게 된 이후부터는 두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아버지가 꼬박꼬박 자신의 바둑을 챙겨준다는데 지고 돌아왔을 때는 내색하지 않은 채 “다음에 잘해라”라고만 한단다. 그는 그 한마디에서 큰 힘을 얻는다고 했다.
그는 “이세돌 사범과 김지석 사범은 전투를 좋아하고 상대하기가 어렵다. 강동윤 사범은 버티는 힘이 세고 박영훈 사범은 형세판단과 끝내기가 강하다”고 평한다. 눈에 띄는 신예 기사로는 신진서 2단을 꼽았다. 수읽기가 빠르고 실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다.
박정환은 “바둑이 좋다. 몸만 허락한다면 평생 바둑을 두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결혼은 서른 전에 하고 싶은데 아직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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