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내부순환로 고가 그늘 북서쪽 주택가 골목으로 50m를 들어간다. 거기서 왼쪽 골목. 너무 뻔해서 잠깐 눈길도 가지 않는 다세대주택 행렬을 따라 서른 발쯤 걷는다. 문득 마주친 막다른 벽 왼편에 5층 높이 건물 한 채가 행렬의 형태 반복을 위반한 채 서 있다. 뻔하지 않고 낯설다. 그런데 편안하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금방 알 수 있다. ‘트임’이다. 눈길 머물 구석을 붙들지 못한 채 당연한 듯 다닥다닥 이어지던 공간이 여기 이르러 숨통을 텄다. 지도를 보면 아직 이곳은 막다른길이다. 하지만 골목 끝 건넛집 주인은 원래 있던 좌우정렬 진입로보다 이 건물로 인해 새로 생긴 샛길을 더 즐겨 밟는다. 몇 주 전부터다. 》
‘내 집 뜰은 담벼락 둘러치고 나만 쓰는 공간’이라는 통념을 거스른 이 다세대주택은 지난해 12월 완공됐다. 이달 초 입주를 마친 세 가구의 구성원은 모두 대학생이다. 이들은 청년주거 문제에 함께 대응하기 위해 지난해 2월 결성한 비영리단체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이다.
회원에게는 조합이 공급하는 ‘사회적 주택’에 입주할 자격이 선착순으로 주어진다. 조합은 공적투자기금과 연계해 여럿이 모여 살기 알맞게 공간을 구성한 공동주택을 짓는다. 입주 조합원은 계약 기간이 지난 뒤 원하는 만큼 계약을 갱신할 수 있다. 학기마다 집세 걱정하던 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현실적 대안을 찾아 나선 것이다.
세상물정 모르는 이상(理想)이 아니었음을 남가좌동의 이 건물 ‘가좌관 330’이 실증한다. 같은 생각을 가진 솜씨 좋은 파트너를 만난 덕분이다. 민달팽이 조합의 젊은 꿈은 전시출판기획과 주거공간개발사업을 병행하는 괴짜 회사 ‘글린트’를 만나 구체화됐다. 글린트는 함께 살기 원하는 이들이 원하는 곳에 적절한 주거를 안정적으로 마련하도록 돕는 ‘새동네 복덕방’ 사업을 펼치고 있다. 가좌관 330 남동쪽에 면한 유사한 형태의 다세대주택은 2년 전 완공된 새동네 프로젝트 1호점이다.
‘소유’가 아닌 ‘더불어 살기’를 지향하는 건축주와 거주 희망자의 열망은 건물 디자인에 오롯이 반영됐다. 건넛집 주인이 선물로 받은 새 샛길은 그 결과물 중 하나다. 설계를 맡은 SoA의 이치훈(35) 강예린(41) 소장은 “1층 필로티(벽 없이 기둥으로 형성해 내부와 외부의 중간 성격을 띠도록 한 공간)를 최대로 넓히고 방범현관 주변에 담장을 쌓지 않아 동네 사람들이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기분 좋게 오가는 길이 나도록 했다”고 말했다.
내부 공간 구성도 문 꼭꼭 닫아건 채 층간 소음으로만 이웃을 확인하는 아파트와 대조적이다. 2층과 3층 입주자는 욕실과 주방, 거실을 함께 사용한다. 개별 화장실과 주방을 쓰는 복층 구조의 4층 2개실 입주자도 채광을 고려해 갈라 만든 지붕 사이 발코니를 공유한다. 20일 밤 찾아간 이곳 입주자들은 3층에 모여앉아 고등어조림과 매생이 부침개를 즐겁게 나눠 먹고 있었다.
2, 3층은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38만 원(1인 1실일 경우). 4층은 보증금 6000만 원에 월세 40만∼45만 원으로 가격 차이를 뒀다. 김범상 글린트 대표는 “집세는 주변 수준에 맞추거나 약간 낮게 잡았다. 재계약 인상률도 5% 이내로 제한해 입주자의 생활 안정을 보장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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