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전문 블로그나 인터넷 여행카페, 독립출판물까지 합하면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여행기를 쓰고 있다. 전문 여행작가를 꿈꾸는 사람이 늘면서 관련 강좌도 인기 있다.
10일 오후 기자는 인기 여행기 블로거가 한번 돼 보겠다는 각오로 서울 마포구 KT&G 상상마당에서 여행작가 이지상 씨(57)를 만났다.
○ “여행기 ‘그까이꺼’…”
“여행기 ‘그까이꺼’, 달빛 아래 와인 나오는 사진 찍어 놓고 ‘센 강에서 마신 피처럼 붉은 와인은 빨간 혀처럼 나를 휘감았다’, 이렇게 쓰면 되는 거 아냐.” 스스로의 출사표이자 다짐이었다.
이 씨는 2011년부터 이곳에서 ‘여행작가·여행 칼럼니스트 과정’ 강좌를 맡아 300명을 지도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시대 이전부터 배낭여행을 시작한 그는 최근 출간한 개정판 ‘그때, 타이완을 만났다’(알에이치코리아)를 포함해 여행책 21권을 출간한 배낭여행 1세대다.
‘일일 스승’인 그에게 지난해 봄 두바이 공항에서 쓴 글을 여행기라고 주장하며 내밀었다.
“공항은 인천도 두바이도 똑같다. 인도인 부부는 우는 어린 아기에게 스마트폰을 쥐여 주었다. 둘러보니 다들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다. 출근길 풍경을 여기까지 와서 보다니. … 한국 신혼부부들은 ‘죄다’ 커플룩을 입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은 옷을 입다 보니 알록달록한 아동복 천지다. 국제적 망신 아닌가, 강한 규탄이 필요하다.”
○ “눈에 보이는 것만 쓰셨네요”
글을 읽은 스승은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었느냐”며 표정이 매우 어두워졌다.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쓰셨네요. 사진과 사진설명식 글만 버무리면 여행기라고 생각하는데 큰 착각입니다.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특히 블로그에 쓰려면 생동감 있게 써야지 1인칭 관찰자 시점은 아무도 안 읽어요.”
스승은 여러 가지 형태로 써볼 것을 요구했다. 스토리 위주의 일화, 감상을 개성 있는 ‘글발’로 풀어내는 에세이, 구체적인 정보를 담은 가이드북까지 세 가지 형태다. 그는 또 “같은 경험을 쓸 때도 대화, 독백, 서술 등 다양하게 섞어 써보면 실력이 늘기 마련이다. 나중에 여행기를 쓸 때도 단조롭지 않고 재미있게 진행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고쳐 쓰려는데 손이 움직이질 않는다.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팩트가 없으니 원고지를 채울 재간이 없다. 스승은 비기(秘技)를 담은 자신의 노트를 공개했다.
○ 스승의 노하우
스승은 일단 두꺼운 대학 노트를 반으로 나눠 썼다. 앞부분엔 여행지 현장에서 수집한 정보나 있었던 일을 메모한다. 뒷부분엔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현장에서 느낀 섬세한 감성을 기록한다. 이러면 정보와 감성이 뒤죽박죽 섞이지 않는다. 노트에 가계부를 함께 기록해도 좋다. 지출 과정을 적다 보면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기록할 수 있고 여행도 계획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스승은 뜻밖에도 ‘여행지에서 어린아이처럼 좋았던 순간이 언제냐’ ‘가장 절실했던 것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니 두바이 공항에서 만난 세계화된 지구라든가, 신혼부부의 공항 패션은 절실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여행은 현지 술집에서 혀가 꼬일 때까지 마음껏 마시던 축제의 밤으로 기억됐다. 생면부지 외국인과 소변기 하나를 나눠 쓰며 우정을 다지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신발이 한 짝밖에 없었던 그런 경험을 고백했다. “그런 실수담이 차라리 좋아요. 특히 블로그 여행기는 엄숙하거나 진지한 글보다 실수담을 털어놓는 솔직하고 가벼운 글이 인기를 얻습니다. 자신만 할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일이 중요해요.”
스승의 마지막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책 한 권 내기는 어렵지 않겠지만 여행작가에 대한 섣부른 환상을 품는 것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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