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국은 말 그대로 ‘떡을 넣고 끓인 국’이지만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조선 후기의 학자 홍석모(1781∼1850)가 쓴 세시풍속서 ‘동국세시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찐 멥쌀가루를 안반(案盤·떡을 칠 때 쓰는 두껍고 넓은 나무판) 위에 놓고 떡메로 쳐서 길게 뽑은 떡을 백병(白餠·흰떡)이라 하고, 이를 엽전 모양으로 썰어 국에 넣고 쇠고기 혹은 꿩고기를 곁들여 끓이면 떡국이라 한다. 이것을 제사에도 쓰고 손님 대접에 사용하므로 세찬(歲饌·설에 차리는 음식)에는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이다.’
새해에 상서로운 흰색의 떡국을 먹으며 새로운 마음을 다지는 것은 일종의 ‘의식’이나 마찬가지다. 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는 “본래 떡은 제사에 올리는 신성한 음식인데, 이 떡을 ‘국’으로 만들어 먹는 것은 신성함을 일상으로 끌어들인 시도”라며 “새해에 떡국을 먹는 것은 신성함을 우리 몸으로 받아들이려는 의식 행위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옛사람들은 떡국을 먹어야 나이 한 살을 더 먹는 것이란 뜻에서 떡국을 ‘첨세병(添歲餠·나이를 더하는 떡)’이라 부르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지역마다 사투리가 있듯이 전국 팔도에 지역별 떡국이 있다는 점이다. 가장 흔한 것은 맑은 육수에 떡을 넣고 끓여 고기, 달걀 등의 고명을 얹어 먹는 ‘서울식 떡국’이다. 지역별 떡국은 대개 이 ‘기본형’에 만두를 넣거나, 지역별 특산물을 더하거나, 떡의 종류를 다르게 한 것들이다. 한 평론가는 “떡국에 지역 특산물을 입혀 소위 ‘창조 떡국’을 만든 것에서 우리 조상들의 상상력의 풍부함을 알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코앞에 다가온 설날을 앞두고 우리나라 지역별 떡국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식품기업 샘표가 운영하는 요리과학연구소 ‘지미원’과 함께 알아봤다.
떡보다 만두… 북쪽 지방의 만둣국들
우리나라 북부 지방에서는 떡보다 만두가 더 많이 쓰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건호 지미원 원장은 “북쪽 지역에서는 쌀농사를 짓기 힘들기 때문에 쌀로 만든 떡 대신 밀이나 메밀 등으로 빚은 만두를 넣어 국을 끓여 먹었다”고 말했다.
북부 지역의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평안도의 ‘굴린만둣국’을 들 수 있다. ‘굴린만두’는 말 그대로 완자 모양의 만두소를 밀가루 만두피로 싸지 않고, 감자 전분에 굴려서 만든다. 만두소의 재료는 다진 돼지고기와 으깬 두부, 숙주 등이다. 만두피 없이 만두소가 그대로 노출돼 있다는 점, 국이 다소 기름져 보인다는 점 등은 단점이지만 다른 만두에 비해 식감이 부드러운 것은 장점으로 꼽힌다.
함경도 지역에서는 예로부터 꿩을 넣은 꿩만둣국을 해 먹었다. 돼지고기 대신 꿩고기를 다져 만두소를 만든다. 국물 역시 꿩고기로 우려낸 육수를 사용한다. 다른 지역에 비해 만두 크기가 커 먹음직스럽고 맛이 담백한 것이 특징이다.
이름이 특이한 ‘강짠지만둣국’은 황해도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배추에 소금을 뿌려 절인 것을 ‘강짠지’라고 하는데 이것으로 만두소를 만든다. 다른 만둣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배추의 식감이 특징이다.
떡이 주는 재미… 조랭이 떡국과 날떡국
경기 개성(황해 개성시)의 ‘조랭이 떡국’은 떡 모양이 남다르다. 떡국에 들어가는 떡의 모양은 흔히 엽전처럼 둥글고 넓적하다. 그에 반해 조랭이 떡국(만둣국)에 들어가는 떡은 조롱박 또는 누에고치 모양이다. 이는 멥쌀 가래떡을 가늘게 뽑아 굳기 전에 나무칼로 비벼 작게 토막 낸 후 조롱박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육수나 고명 등은 서울 떡국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조랭이 떡의 식감이다. 엽전 모양의 떡국과 비교해 식감이 더 쫄깃한 것이 장점이다.
떡 모양을 이렇게 만든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조롱박 모양의 떡을 먹으며 정초에 복을 기원한다’, ‘고려 이후 조선이 들어서자 개성 사람들이 태조 이성계의 목을 조르듯이 떡을 비틀었다’ 등의 설(說)만 있을 뿐이다.
충청도의 ‘날떡국’은 떡의 제조 과정이 독특하다. 멥쌀가루와 찹쌀가루를 반죽해 만든 떡을 마치 수제비 만들 듯 손으로 뜯어(칼로 자르기도 함) 육수에 넣는 방식이다. 날떡국은 손으로 쉽게 만든다 해서 ‘손 떡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쫄깃한 맛보다 부드러운 맛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로 꼽힌다.
굴과 닭장… 경상과 전라의 별미
경남 지역에서 즐겨 먹는 ‘굴떡국’은 통영 앞바다의 굴을 넣어 만든 것이다. 쇠고기나 돼지고기, 꿩고기 대신 멸치, 다시마로 국물을 만들어 해산물 특유의 시원한 맛이 장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굴에 새우, 조개 등을 넣어 아예 해산물 떡국을 만들어 먹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토종닭을 이용한 ‘닭장떡국’은 전라도 지역을 대표하는 떡국이다. 닭고기를 마늘, 생강과 함께 간장에 조려 국물 재료인 ‘닭장’을 만들고 이를 물에 넣고 끓여 육수를 만든다. 굴떡국을 시원한 맛으로 먹는다면 닭장떡국은 간장 특유의 깊은 맛을 음미하며 먹는다. ‘한국세시풍속사전’에 따르면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꿩고기 대신 닭고기를 쓰는 이 음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역 특산물로 만들다… 두부떡만둣국과 몸떡국
강원도에서는 초당두부를 넣은 떡만둣국을 먹는다. 초당두부는 강릉시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천일염 대신 동해 바닷물을 간수(응고제)로 사용해 만든다. 떡만둣국에는 생두부를 넣어도 되고 기름에 살짝 부친 두부를 썰어 넣어도 된다. 두부를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로 큼직하게 썰어 넣어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제주에는 ‘몸(모자반을 뜻하는 제주 방언)떡국’이 있다. 모자반은 제주 연안에서 나는 해조류로 주로 겨울철에 즐겨 먹는 별미다. 몸떡국은 경남의 굴떡국처럼 시원한 맛이 특징이다. 보통 떡국에는 고명으로 달걀지단이나 실고추를 얹는데 몸떡국에는 북어채 등 해산물을 얹기도 한다.
▼싱글족 위한 즉석식에 물메기-통닭 떡국도 등장▼ 전통에서 현대로… 떡국의 진화
떡국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음식이 아니다. 어느새 한식 글로벌화의 대표 주자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국내에서는 1인 가구나 싱글족들 사이에서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즉석조리 떡국이 인기를 끌고 있다.
CJ푸드빌은 지난해부터 한식 레스토랑 브랜드 ‘비비고’를 통해 중국과 싱가포르 등 해외 매장에서 떡국과 떡만둣국을 겨울철 메뉴로
판매하고 있다. 이건호 지미원 원장은 “예전에는 떡국이 새해 첫날에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만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가공식품뿐 아니라
한식당의 일품요리 등으로 활용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몸보신을 위해 떡국을 먹는 사람도 늘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이런 트렌드에 맞춰 이달 초 닭고기와 매생이, 물메기를 재료로 한 몸보신용 이색 떡국 메뉴를 공개했다.
닭고기 떡국은 통닭 한 마리로 만든다. 국물을 줄이고 떡과 닭의 쫄깃한 식감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박범영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 축산물이용과장은 “면역력이 떨어지기 쉬운 허약 체질이거나 영양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든든한 겨울 보양식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매생이 떡국과 물메기 떡국은 해산물 특유의 시원한 맛을 느끼게 해 주는 메뉴다. 매생이의 경우
단백질과 칼슘, 철분 등 무기질이 풍부해 탄수화물이 많이 들어간 떡과 함께 끓여 먹으면 영양 균형이 맞는다. 매생이 떡국은
다시마를 넣고 끓인 국물에 떡과 매생이, 굴 등을 넣고 끓여 만든다. 물메기 떡국의 재료인 물메기는 예전에는 살이 물러 인기가
없는 생선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담백하고 비린내가 없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소비자들이 국으로 많이 끓여 먹는다. 물메기 떡국을
만들 때는 매생이 떡국과 마찬가지로 다시마로 국물을 만든 뒤 내장을 제거한 물메기를 네다섯 토막으로 잘라 떡과 함께 넣어 끓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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