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조광조 일파)의 뜻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고 그것을 빙자해 당을 세우자는 데 있었고 애초 정몽주(1337∼1392)를 위해 계책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중종실록 1517년 8월 7일)
중종 반정(反正)을 이끈 권신들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은 조광조 등 젊고 참신한 인재들을 대안세력으로 키운다.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 일파는 세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성삼문, 박팽년에 이어 자신들의 학문적 스승이자 세조의 정권 찬탈을 비판하다 희생당한 김종직, 김굉필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했다. 시대영합적인 반정 세력과 달리 자신들은 대의를 좇는다는 정치적 차별화를 시도한 것.
당시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문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그 학자의 세계관과 학문 계보가 국가의 공인을 얻는다는 걸 뜻했다. 그러나 세조의 직계였던 중종의 심기가 편치만은 않았던 건 당연할 터. 이들은 중종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충군(忠君)이라는 유교 가치관을 내세우기 위해 엉뚱하게도 고려시대 사람인 정몽주를 끌어들인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의 바람과 달리 오직 정몽주만 문묘에 배향하라고 결정한다. 이로써 조선 개국공신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은 반역자의 오명을 뒤집어쓴 반면, 이성계를 제거하고 고려를 지키려 한 정몽주는 조선왕조의 문묘에 배향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이 책은 정통 역사학자가 아닌 정치학자가 쓴 글답게 조선건국과 문묘 배향의 과정을 권력정치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문묘가 단순히 유교적 대의명분과 학문적 영향력에 따라 구성된 게 아니라 끊임없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재밌는 것은 영원한 충의의 상징인 정몽주도 사실은 처세와 현실정치에 능했던 인물이었다는 저자의 색다른 해석이다. 흔히 정몽주를 말할 때 우리는 선죽교의 피와 단심가(丹心歌)를 떠올리며 권력에 초연한 의사의 모습을 연상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정몽주는 이성계를 도와 우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가담하는 등 충의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취했다. 정몽주가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배가 좌초돼 13일 동안 가죽을 뜯어먹으며 연명한 일화도 그가 생사에 초탈한 도인이 아닌 생존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졌던 보통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 당대 조선 지식인들도 정몽주의 정치적 행보에 의심을 품었다. 예컨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조식(1501∼1572)은 “신돈이 국정을 어지럽히고 최영이 중국을 침범하던 때에 정몽주가 벼슬을 버리지 않은 것은 선비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며 비판했다. 조식의 제자였던 정구도 “우왕과 창왕 부자를 섬겼으면서도 그들을 추방하는 모의에 정몽주가 참여했고 그 공로로 공신 책봉까지 받았다”며 “정몽주의 죽음은 가소로울 뿐”이라고 했다.
정몽주의 상반된 행적을 놓고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문묘 종사는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 개국공신 권근(1352∼1409)이 정몽주의 정치적 복권을 건의한 지 116년 만에야 문묘 배향이 이뤄질 수 있었다. 중종 5년(1510년) 때 영의정 등 삼공(三公)들조차 “정몽주는 고려의 인물로 조선이 개국한 지 이미 오래됐음에도 그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경솔하게 결정할 순 없다”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왕권을 견제하고 건전한 공론으로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는 사림들의 가치관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게 했다. 저자는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시킴으로써 부당한 권력에 맞서다 희생된 지식인의 절의를 치세의 상징이자 시대정신으로 부활시킨 것”이라며 “조광조는 군주의 폭정에 항거하는 지식인들의 권력비판을 보장받으려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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