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동아시아 교류 중심지’ 백제 위상 생생히…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15일 14시 40분


장마가 기승을 부리던 1971년 7월 충남 공주시 송산리 6호분. 침수를 막기 위해 무덤 뒤를 파던 인부들의 삽질이 갑자기 멈췄다. 땅속에 무언가 단단한 게 박혀 있었다. 그 순간부터 이곳 공사현장은 발굴현장으로 일순간 바뀌었다. 땅을 파내자 1500년 전 백제를 호령하던 제25대 무령왕과 왕비가 묻힌 ‘무령왕릉’ 입구가 나왔다.

송산리 6호분처럼 오늘날 적지 않은 고분들이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린다. 무덤 주인을 알 수 있는 주요 유물이 도굴이나 자연재해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령왕릉은 묘지석 등 축조 당시 유물이 그대로 보존돼 묻힌 왕의 이름과 축조시기를 알 수 있었다. 지금껏 발굴된 고대 동아시아 왕릉 가운데 무덤의 주인과 축조시기, 내부구조, 부장 유물을 온전히 파악한 곳은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무령왕은 5세기 고구려와 전쟁에서 크게 패하면서 망국의 위기에 처했던 백제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의 무덤은 곧 회복된 국가 위신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상징이었기 때문에 당대 최고 수준의 기술과 예술역량, 경제력이 총동원됐다. 당시 무덤양식으로 흔히 사용한 석실묘 대신 중국 양나라에서 유행한 ‘볼트형 벽돌무덤(전축분)’을 들여왔다. 연꽃무늬 벽돌을 높게 쌓아 올려 무덤바닥과 천장 사이의 거리가 최고 3.14m에 달하도록 구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부장품도 고급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총 108종, 4600여점의 출토 유물 가운데 12종, 17점이 국보로 지정됐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성을 자랑한다. 특히 뚜껑 달린 은잔과 청동받침으로 이뤄진 ‘동탁 은잔’은 백제 공예기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반구형 몸통과 야트막한 산봉우리를 형상화한 뚜껑, 연꽃 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단아한 곡선을 이룬 잔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데다 받침 위에 올리면 비례까지 완성된다. 일본 군마현 ‘간논즈카(觀音塚)’ 고분에서 출토된 ‘동탁유개동합’이 동탁은잔을 모델로 해 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의 아우라와 미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백제 특유의 곡선미와 비례미 때문이다.

무령왕이 차고 있던 금동의 ‘환두대도(둥근고리자루큰칼)’도 백제의 뛰어난 세공기술을 잘 보여준다. 칼자루 끝부분의 고리 안에는 여의주를 문 한 마리의 용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고 고리 바깥에는 비늘까지 세세히 묘사된 용 두 마리가 양각돼있다. 손잡이 부분은 눈금을 새긴 금실과 은실을 교대로 감은 뒤 위, 아래 단에 금판을 붙였는데 사이에는 은판으로 귀갑문(거북이 등 무늬)을 새겼다. 또 귀갑문 안에는 봉황을 조각했다.

백제의 환두대도는 가야와 신라, 왜로 전파됐다. 일본 나라현 치카츠아스카(近飛鳥) 지역 ‘이치스카(一須賀)’ 고분군에서 출토된 환두대도는 무령왕릉의 환두대도와 형태가 매우 닮아있다.

비단으로 만든 왕과 왕비의 관에 붙였던 순금의 ‘금제관식’도 백제의 정교한 공예기술을 보여준다. 두께 2㎜ 가량의 금판을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오려냈는데 왕의 금제관식은 전면부에 127개의 얇은 금판을 금실로 일일이 꿰어 달아 아름다움을 더했다.

무령왕릉에는 백제뿐만 아니라 당시 바다 건너 여러 나라의 특산품들이 망라돼 있어 동아시아 교류 중심지로서 백제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중국에서 들여 온 각종 도자기와 왕의 목관 재료로 쓰인 일본산 금송, 동남아에서 들여온 색색의 유리구슬 등이 그것이다. 나침반이 발명되기 이전에 백제가 멀리 동남아시아와 교류한 것은 고무적이다. 동시대 동아시아의 문화수준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무령왕릉은 세계가 함께 보존하고 연구해야할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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