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변산반도 낙조를 바라보던 한 작가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전북 부안군 진서면에 자리한 이곳은 서해 특유의 낙조와 개펄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정남향이라 일출과 일몰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13일 소설가, 시인이 운영하는 작가 창작공간 ‘레지던스 변산바람꽃’(변산바람꽃)의 개소식이 열렸다.
변산바람꽃 운영위원장은 안도현 시인, 고문은 박범신 소설가가 맡았다. 운영위원은 젊은 작가들인 백가흠 이기호 소설가, 이원 김민정 임경섭 시인 등이다. 실무를 담당하는 사무국장도 2009년 등단한 정영효 시인이다. 이날 개소식에서 안 시인은 “자연과 가까워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기엔 최상의 장소”라며 “꼭 쓰지 않아도 풍광을 보며 쉬어가도 좋다”고 했다. 변산바람꽃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5년 문학창작공간지원’ 사업에도 선정됐다. 상, 하반기 공개모집을 통해 해마다 작가 20여 명, 습작생 10여 명에게 창작실을 무료로 제공한다.
원래 펜션으로 쓰던 이 건물은 건물주인 부안 지역 치과의사 서융 씨(54)가 작가들에게 제공했다. 그는 지난해 안 시인으로부터 작가들의 창작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간 기증을 결심했다. 서 씨는 “집짓기를 좋아해 집을 여러 채 지었는데 정작 어떻게 쓸지 고민이 많았다”며 “건물 지을 때 천장 달린 다락방을 신경 써서 만들었는데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매일 세끼 신선한 부안 지역 식재료로 만든 식사도 입주 작가에게 제공한다.
모처럼 바닷가에 모여 주꾸미에 소주 한잔 걸친 선후배 작가들의 말이 흥미롭다. 한마디로 ‘작가들은 집에선 글을 쓸 수 없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실제 많은 작가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창작 욕구를 불태울 공간을 찾아 헤맸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무크는 유명 작가 인터뷰 모음집 ‘작가란 무엇인가’(다른)에서 “글을 쓰는 공간은 잠을 자거나 배우자와 공유하는 공간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집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의식이나 세부적인 일들이 상상력을 죽이지요”라고 했다. 그는 작업실이 없을 땐 매일 아침마다 아내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 다음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집으로 돌아와 마치 작업실에 온 것처럼 연기하기도 했다.
국내 작가들도 파무크의 말처럼 “가정적이고, 길들어진 하루 일과”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브호텔, 고시원, PC방, 때론 거리에서 노트북을 꺼낸다. 백가흠 작가도 “집을 떠나면 밖에서 안을 볼 수 있다. 소설의 본질은 그런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는 지난해 여름 학생들이 모두 떠나 을씨년스러운 텅 빈 지방대학 기숙사에서 글을 썼다.
대학 강의를 위해 서울과 광주를 자주 오가는 정용준 작가는 기차에서 소설을 쓴다. 기차 도착 예정 시간과 노트북 배터리 잔량이 마감을 재촉하는 ‘초시계 효과’를 내 집중력을 높인다고 했다. 정 작가는 “몇 년간 쓴 단편들이 모두 기차에서 탄생했다”며 “덜컹거리는 기차 소음이 내겐 집중을 돕는 백색 소음”이라고 했다.
변산바람꽃은 습작생 시절 작품에만 흠뻑 빠져 있을 곳이 없어 고생한 경험을 되살려 습작생에게도 공간을 개방했다. 입주 작가는 습작생과 함께 생활하며 멘토 역할도 하도록 했다. 정식 개소 한 달 전부터 정 작가와 습작생 3명이 시범 입주해 생활하고 있다. 습작생 이광헌 씨(25·대학생)는 “선배 작가가 생활하는 모습을 가까이 보면서 수업시간에 배울 수 없었던 것을 배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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