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이맘때면 바그너-스메타나를 듣고 싶어지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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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1849년 전 유럽을 뒤흔든 시민혁명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민주화나 자치권 부여 같은 요구사항이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고, 유럽의 정치적 지형에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겉만 요란했던’ 혁명은 그보다 반세기 전의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반세기 후 제1차 세계대전과 공산혁명보다 더 많은 작곡가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시기가 마침 낭만주의 음악의 융성기로 많은 작곡 거장이 음악 혼을 꽃피우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찬찬히 살펴볼까요. 오스트리아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이탈리아 혁명을 진압한 보수파 장군 라데츠키를 찬양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을 썼습니다. 그의 아들인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진보파를 상징하는 프랑스 국가를 연주하다 수배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슈만의 부인이자 명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는 연주여행 후 집으로 돌아가다 바리케이드에 가로막히자 길을 막는 사람들을 호되게 꾸짖고 통과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혁명으로 운명이 크게 바뀐 사람으로는 바그너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보수 왕정의 체포영장이 발부돼 파리로, 취리히로 도주 생활을 했고 12년 동안 독일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억압 속에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에서는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 등 애국적인 소재를 오페라로 만들었던 베르디가 애국의 영웅으로 받들어지면서 한껏 인기를 높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원으로 ‘2등 시민’ 취급을 받던 체코인들에게 혁명의 열기는 한층 높았습니다.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는 프라하의 카를 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치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혁명이 좌절된 뒤 그는 급진파로 찍혀 설 자리가 없어졌고 스웨덴의 예테보리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 했습니다. 오늘날엔 그의 동상이 카를 다리 옆에 서 있습니다.

정치적 지형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수많은 작곡가들의 삶에 뚜렷한 선을 그은 혁명. 그 기폭제가 되었던 프랑스 파리의 2월혁명이 1848년 2월 22∼24일 일어났습니다. 이맘때면 바그너나 스메타나의 명선율을 듣고 싶어지는 이유입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바그너#스메타나#시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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