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진입 문턱 낮아져 치열한 생존경쟁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25일 03시 00분


‘프로 기사 300명 시대’ 명암

프로 기사 300명 시대. 여자 기사도 53명. 사진은 24일 열린 여자바둑리그 통합 9라운드에서 용병 위즈잉 5단(왼쪽·서울 부광탁스)과 김윤영 4단(경주 이사금)이 대국하는 모습. 김윤영이 이겼다. 한국기원 제공
프로 기사 300명 시대. 여자 기사도 53명. 사진은 24일 열린 여자바둑리그 통합 9라운드에서 용병 위즈잉 5단(왼쪽·서울 부광탁스)과 김윤영 4단(경주 이사금)이 대국하는 모습. 김윤영이 이겼다. 한국기원 제공

한국기원이 2월 초 일반인 입단대회에서 7명의 초단을 배출하면서 프로 기사 300명 시대를 맞게 됐다. 24일 현재 프로 기사는 모두 302명(남자 249명, 여자 53명).

일본에서 입단한 조남철 초단이 1945년 한성기원을 열며 국수 10명과 함께 한국의 첫 프로 기사가 된 지 꼭 70년 만이다. 그동안 프로 기사와 바둑계는 양적, 질적으로 성장했다. 프로 기사 300명 시대를 짚어본다.

첫 번째 프로 이후 100번째 프로가 나오기까지는 30년(1975년)이 걸렸다. 이후 22년 만인 1997년에 200번째, 다시 18년 만에 300번째 프로가 나왔다. 특히 올해부터는 한 해에 프로기사가 15명씩 나와 이런 추세라면 7년 뒤에 400명이 된다. 그만큼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초창기 프로 기사들은 사회적으로 예우를 받았다. 프로 기사가 귀했고, 단(段)의 권위도 높았던 시절이었다. 대략 광복 이후 1980년대 말까지가 그랬다. 당시 프로들은 먹고사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바둑을 예(禮)로 여기던 시절이기도 했거니와 벌이도 괜찮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현역에서 활동하는 프로 기사는 100명을 넘지 않았다. 작고하거나 사직하는 프로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이창호의 등장과 맞물려 어린이 바둑교실이 늘어나고 국내외에서 각종 기전이 창설되는 등 바둑의 저변이 급격히 팽창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사정은 급변했다. 어린이 바둑교실이 속속 문을 닫고 기전은 축소되거나 폐지됐다. 당연히 프로 기사의 삶도 팍팍해졌다. 그런데도 프로 기사 등용문은 넓어지고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프로 기사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만큼 활동영역은 넓어졌다. 기존에는 대회 참가수입으로 살아가는 토너먼트 프로가 아니라면 바둑도장의 지도사범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방송 해설, 바둑리그 감독, 해외 보급, 바둑 교사 등으로 새 길을 찾는 기사들이 생겨났다. 아예 회사원이 되거나 기업을 차리는 기사도 있었다.

최근에는 ‘동작바둑교실’, ‘꽃보다 바둑센터’ 등 여자 기사들의 바둑교실 개원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세신 바둑TV 편성실장은 “바둑이 스포츠로 변신을 꾀하고 프로의 진입장벽이 낮아지면서 바둑도 다른 스포츠처럼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성룡 9단은 “한 해 서너 명씩 입단하던 우리 때와 달리 무더기로 입단해 프로 면장의 가치가 떨어졌다”며 “프로들이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기원은 돌파구 중의 하나로 올해부터 바둑을 정식 종목으로 채택한 소년체전과 유치원 바둑교실에 기대를 걸고 있다.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우는 사람이 늘어나면 바둑의 인기를 되찾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 바둑이 전국체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 프로 기사의 일자리 창출과 바둑의 인기 회복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박치문 한국기원 부총재는 “미국 프로골퍼 10만 명 중 투어 프로는 130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 인기가 높다. 우리 바둑도 시니어와 여성은 보호하되 토너먼트 프로의 경쟁력을 강화해 인기를 높여야 한다. 그게 바둑계가 살길”이라고 말했다.

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프로 기사 300명#생존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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