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부풀린 파마머리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양복 입은 20대 사내가 여행 가방 위에 자비 출판으로 만든 소설집 ‘엄청멍충한’을 쌓아 놓고 팔고 있었다. 그는 교정기를 단 치아를 자랑하듯 연신 웃으며 행인들에게 소설을 팔았다.
마침 그때 출판사 열린책들 강무성 주간이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갔다. 강 주간은 젊은 친구가 안쓰러워 책도 한 권 샀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혼자 읽기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래서 신춘문예나 문학지 등의 등단 시스템을 거치지 않은 ‘미등단 소설가’임에도 정식 출간을 결정했다. 미등단 소설가의 ‘길거리 캐스팅’인 셈이다.
최근 미등단 작가의 첫 소설이 잇달아 출간돼 우리 문학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30대 건축가, 20대 대학생, 10대 고교생까지 저마다 개성 강한 이야기를 선보인다.
소설집 ‘엄청멍충한’은 2014년 김해 건축상을 받은 건축가 한승재 씨(32)가 썼다. 그는 버스에서 실수로 교통카드 대신 열쇠를 단말기에 찍고 내렸더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검은 산), 척추가 여름날 ‘쭈쭈바’처럼 녹아 아무 데나 드러눕는 증상을 겪는 인류가 등장하는(직립 보행자 협회) 등 8편의 기묘한 이야기를 썼다. 그는 “내가 눕고 싶은 곳에 누울 수 없고, 내가 자고 싶은 시간에 잘 수 없는 것을 행복하지 않다고 말해야 옳은 것이다”(직립 보행자 협회)라며 사회에 대한 통찰도 담아낸다.
그는 “정식 등단은 절차도 잘 모르고 경쟁 같아서 생각해보지 않았다”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처음엔 그림으로 그렸다가 글을 덧붙이고 그러면서 책까지 쓰게 됐다”고 했다. 강 주간은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작가만의 독특한 색깔이 장점”이라고 했다. 한 씨는 단편소설집 ‘걔가 걔고 걔가 걔다’도 출간할 예정이다.
출판사 푸른숲은 연세대 국제학과에 재학 중인 김율 씨(21)의 장편소설 ‘스무 살을 적절히 부적절하게 보내는 방법’을 최근 출간했다. 대학 신입생들이 빨간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기숙사를 배회한다는 ‘빨간아이’ 괴담의 실체를 추적하는 이야기다. 김명인 문학평론가는 “처음엔 우리가 만든 것이되 나중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마침내 우리를 지배하고 소외시키는 물신적 존재의 힘에 대한 서늘한 알레고리가 들어 있다”고 평했다.
소설에는 ‘연애고자’ ‘발암물질’ 같은 요즘 20대의 언어가 그대로 등장한다. 편집자 윤진아 씨는 “등단이란 프레임을 통과한 작가의 소설보다 김 씨의 소설이 20대 독자가 읽기에 동시대성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출판사 박하는 제주국제학교 학생 안현서 양(17)이 쓴 장편소설 ‘A씨에 관하여’를 최근 출간했다. 박철화 문학평론가는 “작가의 젊다 못해 어린 나이를 고려하면, 사물과 현상을 보는 섬세한 관찰력과 표현력에 더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그 시선의 성숙함이 놀랍다”고 평했다.
정해종 박하 대표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바늘구멍 같은 등단 절차를 통과한 작가의 활약도 중요하겠지만, 다양한 연령, 개성의 작가에게 문호를 개방하면 한국 문학에도 훌륭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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