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94세를 일기로 선종(善終·별세)한 이춘선 씨의 사연입니다. 슬하의 7남 1녀 중 아들 넷이 사제가 됐고, 유일한 딸도 수녀로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교계에 따르면 한국 가톨릭 최초의 4형제 신부죠.
20년 전, 막 사제품을 받고 강원 홍천본당으로 떠나는 막내아들 오세민 신부(속초 청호동 성당 주임신부)는 어머니로부터 작은 보따리를 받았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풀어보라는 당부와 함께.
“사랑하는 막내 신부님! 당신은 원래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보따리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편지와 오 신부가 백일과 세 살 때 입었던 저고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작은 저고리들은 성직자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이 이처럼 작은 존재였음을 기억하고 살아달라는 당부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생전 자녀들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또 장례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이 너무 슬퍼하지 않도록 두 번 웃겨 드리라는 당부를 남겼답니다. 그래서 오 신부는 미사 중 갑자기 선글라스를 껴 참석자들에게 잠깐의 웃음을 줬다고 하네요.
기자 입장에서 네 신부를 만나 어머니의 삶과 자녀들의 신앙에 얽힌 사연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장례미사에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웃겨 달라는 이유도 몹시 궁금했습니다. 한 차례 인터뷰 요청을 거절당한 뒤 26일 오전 오 신부와 통화했지만 “이미 알 만한 분들은 아는 이야기”라며 역시 어렵다는 답만 들었습니다.
저는 답을 들을 수 없었던 그 웃음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오 신부의 어머니에게 죽음은 비종교인들이 느끼는 그것과는 다를 듯합니다. 그분은 선종 전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고, 장례미사에 쓸 성가를 직접 고르기도 했답니다. 독실했던 신앙인에게 아들 넷을 신부의 길로 이끈 현실은 행복한 세계였고, 내세 역시 두려움 없는 삶 아니었을까요? 그러기에 장례하면 떠오르는 슬픔과 눈물보다는 웃음꽃으로 자신의 장례미사를 채우고 싶었으리라 추측합니다. 또 평소 ‘아들 신부님’들에게 낮추는 삶을 강조한 것을 보면 참석자들을 위한 배려도 깔려 있을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한 보통 사람들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하루하루 죽음 속으로 다가서면서도 그 단어를 잊은 듯 살아갑니다. 그러다 갑자기 닥쳐온 불행이나 가까운 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보면서 이를 실감합니다.
막내 신부님! 떠나면서도 웃음을 주고 간 어머니의 삶이 부럽습니다. 그리고 웃음 두 번의 비밀도 여전히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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