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명소에서, 예컨대 세계적인 왕궁 같은 곳에서 대중적인 팝아트 전시를 연다면 어떨까? 더구나 그 작품이 소비사회의 상품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포르노나 만화 같은 ‘저급한’ 이미지라면? 바로 2010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베르사유에서 열렸던 무라카미 다카시의 특별전 때의 일이다.
프랑스의 자랑,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에 망가(일본 만화)에서 비롯된 장난감 같은 무라카미의 작품들이 잔뜩 설치됐다. 우아하고 정교한 프랑스 문화를 격하시키는 일본의 키치(통속적 예술)라는 의견이 쇄도했다. 특히 프랑스 보수집단은 상업 미술이 태양왕 루이 14세의 집을 망친다고 맹비난을 했다. 그러나 관장을 비롯한 전시의 주최 측은 이것이 역사의 유산과 현대미술을 대면시켜 과거와 오늘을 연결하는 기회가 될 거라며 맞섰다.
결국 ‘베르사유의 무라카미’라는 제목의 전시가 세계의 이목을 끌며 개최되었다. 작가는 화려한 궁전 건물의 15개 방과 넓은 야외 공원을 22점의 조각과 회화, 그리고 장식적 카펫과 램프 등으로 채웠다. 그의 작품 중 상징적으로 가장 중요한 ‘타원형 금동부처(Oval Gold Buddha)’(2010년·그림)는 청동과 철에 얇은 금박을 입힌 대형 조각이다. 베르사유 궁 건물 정면과 분수대 사이에 설치되어 방문자들의 시선을 한껏 받았다.
웃고 있는 큰 입의 기괴한 이 금동상은 높이가 5.68m에 이른다. 마치 자신이 태양왕 루이 14세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프랑스의 17세기 왕궁 앞에 금동부처라니 엉뚱하고 우스꽝스럽다. 황금색은 명백하게 태양왕을 상징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 그러나 동시에 이후 지속된 절대왕정의 권력과 사치를 희화화하기도 한다. 팝아트 전형의 유머와 풍자가 넘친다.
전시가 베르사유 궁전의 수치인지, 옛 왕궁에 신세대의 활력을 불어넣는 건지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논란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3개월 전시 기간 동안 베르사유를 찾은 관람객 수는 평소보다 압도적이었다. 프랑스 미술계를 전 세계가 주목하도록 만든 전시. 다른 건 몰라도 과거의 찬란한 유산으로만 여겨졌던 왕궁이 오늘날의 미술과 관계를 맺은 건 확실했다. 일상의 삶과 분리돼 보이던 빛바랜 역사의 현장이 대중에게 재미있고 친근히 다가왔던 것. 좋건 싫건 미술은 시대의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전시는 그 변화를 실감하게 하는 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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