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맞으며/김영길]燒紙의 추억과 덤으로 누리는 삶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5일 03시 00분


김영길 (사)희망도레미 사전의료의향서 지원단장
김영길 (사)희망도레미 사전의료의향서 지원단장
내 어린 시절 어머니는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을 무당 할머니를 모셔와 고사상을 차리고 치성을 드렸다. 예닐곱쯤이었을까. 어느 이른 아침 아랫목에서 눈을 떴을 때도 어머니와 무당 할머니는 소복 차림으로 나란히 서서 주문을 외셨다. 마침 외지에서 학교에 다니던 형님의 입신양명을 빈 다음 소지(燒紙), 즉 흰 종이를 태웠다. 무당 할머니가 익숙한 솜씨로 불을 붙여 위로 밀어 올렸다. 종이는 천장까지 곧추 올라갔다가 재가 되어 사뿐히 내려왔다. 나는 형님이 앞으로 진짜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음은 나를 위한 순서였으므로 형님과 내 운명의 차이를 실제로 볼 수 있겠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이윽고 불이 붙은 종이가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종이는 천장 높이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고 곤두박질했다. 불이 꺼지면서 떨어진 그 종이는 바로 나였다. 나는 하마터면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것은 내가 머지않아 요절하리라는 강한 암시였다. 어린 나의 뇌리에 깊게 새겨진 ‘나는 단명할 것’이라는 아픈 믿음은 삶의 힘든 고비에서마다 나를, 최후를 상상하는 청소년으로 이끌었다.

여름철에 심한 배앓이를 하거나 학창 시절 가슴의 통증을 폐병으로 알고 고민하던 때 그리고 군복무 중 힘든 시기에도 그 소지 사건을 떠올렸다. 한창 열심히 생활하던 30, 40대에는 잊고 지내다 50대 이후 가끔 그 기억이 떠오른다.

옛날과 달리 이제는, 내 삶은 어쩌면 하늘이 내려준 보너스로 누리는 수명인지도 모른다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는 생각을 한다. ‘웰다잉(Well-Dying)’ 강사가 된 것이 우연만은 아닐지 모른다. (사)희망도레미에서 사전의료의향서 지원단(02-393-9987) 단장으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장수시대에 시니어들이 마지막 단계에서 심폐소생술이나 인위적 영양 공급 등 무의미한 연명 치료로 고통받으며 가정과 사회에 큰 부담과 불편을 남기는 일이 없도록, 건강할 때 미리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자는 도우미 활동을 하고 있다. 의향서 양식을 무료 제공하면서 작성과 활용을 열심히 안내하는 뜻도, 나의 수명을 덤으로 늘려주신 하늘에 대한 보은의 작은 인사인지 모른다.

우리 사회의 모든 성인들이 ‘삶을 보다 품위 있게, 마무리를 보다 존엄하게’ 맞이하기를 바라는 진솔한 마음과 함께….

김영길 (사)희망도레미 사전의료의향서 지원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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