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영국의 국영 방송 BBC2에서 13편의 시리즈물이 방영되었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텃밭정원’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회양목으로 두른 경계, 자갈을 깐 걸어 다니는 길, 벽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나무로 틀을 짠 온실을 기본으로 하는 이 전통 정원을 복원해 여기에 직접 채소와 열매를 재배해보는 프로그램이었다.
‘빅토리안 키친가든’이라고 불리던 당시 텃밭 정원은 지방 영주들의 주거지에 만든 것으로 사방이 3m가 넘는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흔히 ‘담장정원(Walled garden)’으로도 불렸다. 이 정원은 수백 명에 이르는 저택의 식구들이 먹어야 할 채소와 과일, 허브, 버섯을 키웠던, 그 규모도 상당한 공간이었다. 이런 자급자족 텃밭정원이 사라진 것은 공장 형식의 대규모 경작이 발달하면서였다. 이때부터 채소와 과일은 직접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값싸고 손쉽게 시장에서 사먹는 것으로 전환이 되었고 텃밭정원도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조금씩 달라졌다. 단위 면적당 최대치를 생산해야 되는 공장식 재배는 농약, 비료 등의 화학제를 많이 쓸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생산된 채소, 열매의 맛이 달라지면서 직접 키우고 수확해서 식탁에 올렸던 옛 방식을 사람들이 그리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요즘 텃밭정원은 전 세계적인 열풍이다. 미국 대통령 부인인 미셸 오바마가 백악관의 정원을 텃밭으로 바꾸어 버린 것도 이 열풍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최신 정원 디자인의 세계를 보여주는 플라워 쇼에서도 작가들이 앞다퉈 신개념의 텃밭정원을 선보이고, 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얻어간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텃밭 문화는 어떠할까? 우리 역시도 비슷한 쇠퇴의 과정을 겪었고, 지금은 부흥의 조짐을 보인다. 그런데 좀 다른 점이 있다. 우리는 버려진 빈 땅 어디라도 무엇인가를 심고 마는 텃밭에 대한 뼛속 깊은 사랑이 있어 그 어떤 민족보다 텃밭을 잘 가꿀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은 텃밭 자체에만 머물러 있을 뿐 텃밭정원은 아니기 때문이다. 텃밭과 텃밭정원의 차이점은 이 공간을 단순히 채소와 열매를 수확하는 공간이 아니라 정원으로서의 관상효과를 고려한 ‘텃밭정원’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어떻게 하면 관상효과와 더불어 맛도 좋은 채소와 열매를 길러낼까?
기능과 미를 동시에 잡는 몇 가지 노하우가 있다. 채소는 유난히 벌레의 공격을 많이 받는다. 이 벌레를 막기 위해서는 우리가 잘 아는 살충제를 치는 방법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지만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그 부작용도 심각하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른바 ‘생물학적 퇴치’로 천적이 되는 새와 같은 동물을 불러들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도시 속의 작은 베란다에서는 이도 어려운 일이다. 이럴 때 한 가지 방법으로 섞어 심기가 있다. 한 종류의 채소를 줄지어 심는 것은 곤충들에게 ‘어서 와, 여기에 먹을거리가 많아’라는 메시지를 주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배추 옆에 파를 심고, 겨자 옆에 향기를 내는 금잔화, 한련화 혹은 화려한 꽃을 피우는 관상용 식물을 심어 곤충들에게 혼선을 주는 방법이다. 우리 눈에는 꽃이 있어 보기 좋고, 채소에게는 해충이 다가오는 기회를 줄이는 효과가 있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같은 자리에 해마다 같은 작물을 심지 않고 번갈아 심는 방법도 효과가 뛰어나다. 같은 자리에 같은 식물을 심으면 흙 속에 병원균이 미리 진을 치고 공격할 식물이 찾아오면 반갑게 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예측하지 못한 식물이 들어오면 혼란을 겪으면서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작은 베란다에서도 이 원리는 마찬가지다. 상자를 여러 개 마련해 번호를 매긴 후 1번 상자에 올해 고추를 심었다면 다음 해에는 옆 2번 상자에 고추를 심고 1번에는 상추 같은 다른 작물을 심어주는 것이 좋다. 또 호박, 오이, 토마토와 같이 열매를 맺는 채소들은 영양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음 해에는 뿌리를 통해 질소를 남겨주는 콩과 식물을 심어 영양분이 남겨질 시간을 벌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식물의 지지대를 아름답게 설치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완두콩 오이 호박 고추 가지 등은 지지대가 있어야 식물들이 줄기를 튼튼하게 키우는 일을 중단하고 열매를 맺는 데 힘을 쏟는다. 그래서 지지대의 설치가 필수적인데 이 지지대를 포함해 과실수를 좀 더 아름답게 붙잡아 키우는 노력이 유럽에는 아주 오랫동안 있어 왔다. 이런 노력이 텃밭을 ‘정원’의 개념으로 끌어주는 원동력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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