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참외의 참맛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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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경북 성주에서 참외 한 상자가 도착했다. 수십 년을 친정아버지처럼 보살펴주시는 96세 선생님이 당신 고향의 특산물을 보내신 것이다. 정정하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이런 것까지 보내시다니, 상자를 여니 선생님의 고향 땅에서 잘 자란 참외가 노랗게 익어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엄마가 참외를 너무나 좋아하셔서 나 어렸을 적에는 참외를 한 접씩 사놓고 먹곤 했다. 그런데 참외를 먹을 때마다 집안이 시끄러웠다. 오빠와 나는 참외의 씨가 들어 있는 속을 파내려 하고 엄마는 이 맛있는 걸 왜 버리느냐며 성화를 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집이 센 우리 남매는 기어이 속을 파내버렸고 그것이 아까운 엄마는 우리가 파낸 것까지 잡수셔서 우리를 질색하게 만드셨다. 그렇게 여름 내내 엄마랑 실랑이를 벌이며 참외를 먹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지금, 나도 점점 참외 속이 맛있게 느껴지니 말이다. 이래서 어른들은 나이가 들수록 딸은 엄마를 닮아간다는 말씀을 하셨나 보다. 요즘 참외를 깎으면서 씨만 살살 발라내는 나를 보고 딸이 단호하게 말한다.

“엄마, 속 좀 완전히 긁어내고 줘요.”

딸의 말을 들으니 마치 오래된 영화 필름을 다시 돌려보는 것 같은 느낌에 내 속이 알싸해진다. 올 한식에 엄마 산소에 가지 못했는데, 이번 주말에는 성주 참외 싸들고 성묘를 가야겠다. 그러면 엄마는 특유의 명랑한 목소리로 한마디 하실 것 같다.

“거봐라, 참외는 속이 달다니까. 우리 딸이 이제야 참외 맛을 제대로 알았네.”

무엇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한때 유행하던 광고에서 “너희가 게 맛을 알아?”라고 말하며 의미심장하게 웃던 노배우의 표정이 떠오른다. 아마 예전에 엄마도 우리를 보며 속으로 그러셨을지 모르겠다. “너희가 참외 맛을 알아?”

세월은 물어보지 않아도 답을 알려준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 나이 들면서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우기지 말 것. 아니라고 말하기 전에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볼 것.

참외 맛을 아는 데도 이렇게 오랜 세월이 필요했는데 사람 속을 아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여름을 훨씬 앞질러 도착한 노란 참외를 보며 엄마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96세 선생님이 오래도록 곁에 계셔 주실 것을 소망해본다.

윤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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