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19년(1795년) 3월 판의금부사(종1품) 홍양호(洪良浩)가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도성에서 쫓겨났다. 그때 그의 나이 71세. 1년 넘게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기쁜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경주에서 한 농부가 밭을 갈다 문무왕릉비를 발견했다는 것. 평소 비석 탁본을 수집하고 연구해 온 그는 이조판서와 대제학 등을 지내며 쌓은 인맥으로 어렵사리 탁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탁본을 펼쳐든 순간 문득 젊은 시절의 일화가 떠올라 잠시 회상에 잠겼다. 벌써 서른여섯 해가 지났건만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했다.
때는 세월을 거슬러 1760년 가을. 지독한 가뭄이 조선 전체를 뒤흔들던 당시 홍양호는 종2품에 해당하는 경주부윤에 제수됐다.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기우소인 이견대(利見臺)를 서둘러 찾았다. 왜 하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를 기우소로 삼았는지 물었더니 행사에 참여한 지역 인사들은 ‘죽어서 용이 된 문무왕의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처음에는 황당하다고 여겼지만 관아로 돌아와 삼국사기를 찾아봤더니 관련 내용이 떡하니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유학자로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경주에 머무는 동안 궁금증은 나날이 커져 문무왕릉을 찾아 곳곳을 답사했다. 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한 채 한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흔이 넘은 나이가 돼서야 문무왕릉의 흔적을 오롯이 담은 탁본을 조우하게 된 것이었다. 감개무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른쪽 상단의 ‘신라문무왕릉지비(新羅文武王陵之碑)’라는 여덟 글자는 이것이 문무왕릉의 비석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특별히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장례를 지낼 때 땔나무를 쌓아올리고 큰 바다에서 쇄골 의식을 거행했다’는 구절이었다. 비록 비문의 일부만 남아 아쉬웠지만, 그는 이 구절이야말로 삼국사기의 정확성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판단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세상을 뜬 뒤 문무왕릉비에 관심을 기울인 이가 있었으니 동아시아 금석학 연구의 최고봉 추사 김정희였다. 1817년 사천왕사 부근 밭둑에 방치돼 있던 문무왕릉비를 찾아내 탁본을 뜬 뒤 이를 바탕으로 비석의 작성 시기를 추정했다. 김정희의 조사 이후 비석 조각들은 재차 행방이 묘연해졌다.
문무왕릉비 조각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61년이다. 경주 동부동 민가에서 비석의 아래 조각이 우연히 발견됐다. 하지만 위쪽 조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던 중 2009년 9월 근처의 다른 민가에서 드라마틱하게 발견됐다. 빨랫돌로 쓰이던 비석 조각을 수도 검침원이 우연히 발견해 낸 것. 현재 문무왕릉비는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실에 전시되고 있다.
문무왕의 위업이 고스란히 새겨진 능비는 숱한 사연을 겪으며 지금껏 남게 됐다. 이 능비는 삼국통일 직후 신라의 학문과 서예 수준을 잘 보여 주며 역사책에 기록돼 있지 않은 문무왕의 나이를 알려 주는 등 신라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취급된다. 그뿐만 아니라 화장한 뒤 뼈를 바다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아들인 신문왕이 실제로 이행한 사실을 전하고 있어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을 새삼 일깨워 줬다.
지금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문무왕의 이미지는 마치 퍼즐 맞추기와도 같은 과정을 거쳐 완성됐다. 홍양호 김정희를 비롯해 비석을 발견한 농부와 빨랫돌로 사용된 비석을 알아보고 신고한 수도 검침원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위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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