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를 가 본 이라면 저 머라이언(Merlion)상만 보고도 이 엽서가 거기 것임을 금방 알아챈다.
머라이언은 싱가포르 상징물. 그리고 여긴 싱가포르 강 하구, 마리나베이의 워터프런트다. 배 한 척을 고층빌딩 세 개가 떠받친 모습의 복합리조트호텔 마리나베이샌즈가 물 건너로 보이는 수변공원이다. 그런데 이곳은 2009년 이전만 해도 버려진 개펄이었다. 미술관 쇼핑몰 카지노로 이뤄진 복합리조트가 들어서면서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됐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홍콩 빅토리아하버의 야경에 못잖은 멋진 스카이라인이 관광객을 맞는다. 더불어 마리나베이샌즈는 싱가포르의 랜드마크로 부상했다.
머라이언을 보자. 이름 그대로 인어(Mermaid)의 몸에 사자(Lion)의 머리를 한 형상으로 말레이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각 나라엔 상징이 있고 그 상징은 그 나라의 특성을 속속들이 보여 주는 현미경 역할을 한다. 수차례 취재를 통해 얻은 지식과 정보, 경험과 이해를 토대로 나는 이 머라이언에서 싱가포르의 DNA를 확인한다. 그건 ‘퓨전(fusion)’이다. ‘융합’이라 풀이되는 이 단어, 서로 다른 것을 합쳐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뜻이다.
그걸 극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가 있다. 19세기 여기서 탄생한 싱가포르슬링이다. 이 칵테일은 ‘진 슬링’의 싱가포르 버전으로 이곳에 흔한 열대과일을 첨가하는 게 요체. 그것만으로는 융합이라 부르기 힘들다. 단순한 혼합이 아니라 융합임을 알려면 만든 과정을 알아야 한다. 주인공은 중국 하이난 섬 출신의 화교이고, 그는 영국 상인이 드나들던 래플스호텔 롱바의 웨이터였다. 즉 싱가포르슬링은 중국인이 영국인을 위해 유럽 칵테일에 열대과일을 넣어 싱가포르에서 개발한 것이다.
싱가포르에는 이런 사례가 허다하다. 싱가포르인이 구사하는 영어인 ‘싱글리시(Singlish)’는 어떤가. 발음 구문 억양이 정통 영어와 확연히 구별된다. 탄생 배경은 싱가포르슬링보다 복잡하다. 싱가포르에서 사용되는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중국계 언어가 점령자 영국인의 언어와 뒤섞인 덕이다. 서민 식당 호커센터(Hawker Center)도 그렇다. 각 민족의 다양한 음식 코너로 구성된 푸드코트인데 중국식 국수에 말레이식 디저트, 싱가포르 커피를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이런 환경은 싱가포르 음식을 퓨전 스타일로 발전시켰다. 다양한 음식과 재료, 양념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충돌하고 조화를 이뤘다. 그 융합은 이젠 식당과 조리사로까지로 발전했다. 매년 3월 ‘세계미식가대회(World Gourmet Summit)’의 ‘요리장인 사파리(Masterchef Safari)’가 그것. 손님 10여 명이 전용 차량으로 4, 5개 식당을 옮겨 가며 코스요리를 즐기는 이벤트다. 싱가포르의 융합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최고의 식도락이 아닐 수 없다.
싱가포르는 말레이 반도 최남단의 연륙도다. 반도란 무엇인가. 반(半)은 섬, 반(半)은 육지다. 섬이자 육지이고 육지이자 섬이기에 해양과 대륙의 충돌과 융합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는 그 탄생부터가 퓨전인데 19세기엔 동서양의 접점으로 각광을 받게 된다. 1812년 영국이 이 섬을 동서 무역 거점으로 삼으면서다. 1972년 영국이 떠나기 전까지 160년간 서양문화가 끊이지 않고 이식되며 융합 역시 계속됐다. 싱가포르가 ‘동서양 문화의 용광로’로 불리는 이유다. 1990년대 싱가포르의 관광 브랜드 ‘뉴아시아’는 그런 싱가포르를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다.
싱가포르의 국부(國父) 리콴유 전 총리가 서거한 지도 벌써 한 달을 넘겼다. 그가 추구해온 아시아적 가치를 두고 독선적, 비민주적이란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비판 이전에 눈여겨볼 게 있다. 이질적 요소의 만남을 충돌이 아니라 융합으로 아우르며 스마트한 나라로 변모시킨 유연한 사고와 지혜다. 충돌은 파괴를 낳지만 융합은 창조를 잉태한다.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의 싱가포르를 내전 없이 융합시킨 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위대한 지도자다. 그는 싱가포르에 내재한 융합 DNA 그 자체이자 상징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