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상 교수의 영원을 꿈꾼 천년왕국 신라]<6>통일신라 영욕 품은 안압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4일 03시 00분


자연의 타임캡슐서 쏟아진 깜짝 유물들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제 남근(위쪽)과 14면체 주사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제 남근(위쪽)과 14면체 주사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1975년 3월 25일 황남대총 발굴단에서 차출된 정예 조사원들이 경북 경주 안압지(雁鴨池)에 모였다. 때마침 날씨는 맑았고 지난겨울 발굴단을 괴롭혔던 삭풍 대신 따스한 봄바람이 불었다.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시작할 때 고사를 지내곤 한다. 상 위에 돼지머리를 올리고는 발굴이 무사히 끝나길, 최고의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빈다. 그런데 안압지 발굴팀 조사원 대부분은 심경이 조금 복잡했다. 고분 발굴 현장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는데 갑자기 차출돼 마음이 상하거나 유적 일부가 이미 파괴된 질퍽이는 연못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싶은 생각을 하는 팀원들이 적지 않았던 것.

하루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조사원들의 긴장감은 차츰 높아졌다. 연못 곳곳에서 처음 보는 유물이 쏟아졌는데 나무나 뼈로 만든 기물들이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채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진흙을 걷어낼 때마다 속살을 드러내는 유기물과 완벽한 보존상태에 놀랐지만 안타까움도 공존했다. 외부 공기에 노출되는 순간 유기물의 색깔이 변하며 훼손됐기 때문이다.

발굴에 들어간 지 두 달을 넘긴 5월 29일 예상치 못한 유물을 만났다. 북쪽 구역에서 진흙을 제거하던 도중 17cm 길이의 나무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스레 물로 씻던 조사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도 리얼한 형태의 남근이었기 때문이다. 궁궐 연못 속에서 이토록 사실적인 목제 남근이 출토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용도에 대해 실용품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요즘에도 바닷가 해신당(海神堂)에서 남근을 깎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여성을 상징하는 연못에 제사를 지내면서 넣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놀라움은 계속 이어졌다. 6월 19일에는 연못 서쪽 바닥에서 14면체의 나무 주사위가 출토됐다. 참나무를 깎아 만든 것으로 크기는 4.8cm. 역시 물로 닦자 각 면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촬영을 서둘러 마치고 판독해 보니 면마다 새겨진 것은 사자성어였다. 이 중 ‘소리 없이 춤추기(禁聲作%)’ ‘술을 모두 마시고 크게 웃기(飮盡大笑)’ ‘술 석 잔을 한번에 마시기(三盞一去)’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任意請歌)’ 등이 눈길을 끌었다. 이 때문에 주령구(酒令具)라는 이름이 붙었다. 연못가 건물 위에 둘러 앉아 만면에 홍조를 띤 채 박장대소하며 술잔을 돌리고 가무를 즐기던 신라 귀족들의 풍류가 눈앞에 선하다.

도대체 안압지는 어떤 곳이었기에 이런 특이한 유물이 출토된 걸까.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왕궁을 넓히는 과정에서 만든 궁 안의 인공 연못이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674년(문무왕 14년)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마치 경복궁 경회루처럼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거나 아름다운 새나 화초를 감상하는 휴식공간이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노닐었을 이 연못은 통일신라와 영욕을 같이했다. 신라 멸망 후 연못 속의 인공 산이나 주변 건물은 모두 무너져 내려 웅장함은 사라지고 대신 부평초나 연꽃이 무성한 모습으로 변했다. 안압지는 당시 생긴 이름으로 원래 명칭은 월지(月池)였다. 이곳에서는 신라 사람들이 실수로 빠뜨렸거나 주술적 의미에서 일부러 빠뜨린 것까지 3만 점 이상의 다양한 유물이 원형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발굴됐다. 촉촉한 진흙이 천 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을 거치며 잊혀진 신라 문화를 온전히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
#안압지#남근#나무 주사위#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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