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 같다.’ 쇼펜하우어의 이 말을 마광수 에세이에서 처음으로 읽고 크게 공감했던 게 세월을 헤아리기 싫을 만큼 오래전이다. 쇼펜하우어도 그랬을까. 그러니 찰나의 즐거움이나마 악착같이 잡아채자고, 그를 징검돌로 인생의 지겨움을 견뎌 건너자고, 쾌락을 추구했을까.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쾌락은 육체의 쾌감이리라. 마광수가 필화를 겪게 한 성적 판타지를 거침없이 펼친 글들, 말하자면 ‘음란한 묘사’들은 쾌감을 원하는 게 육체의 본성인데 정숙한, 하다못해 정숙한 체하는 게 미덕인 사회에 대한 예의로 그것을 자기 속에 눌러두는 사람들의 숨통을 터주고 싶은 욕망에서 나왔을 테지만, 그의 관능에의 허무적 탐닉을 보여준다. 육체는 즐거워라! 몸뚱이가 닿고 포개짐으로 서로의 체온과 떨림이 스며들고 증폭되는 그 순간만은 존재의 외로움, 허무감이 잊히리.
당신은 숭늉을 좋아하십니까? 나는 달콤하고 짜릿한 ‘환타’를 좋아합니다. 다들 정장 차림인데 혼자 해수욕장인 양 수영팬츠 하나 걸치고 유유해서 점잖은 양반들 입술을 실룩거리게 하던 마광수가 ‘늙는 것의 서러움’이란다. 이제 고통도 쾌락도 덤덤해질 연세이련만 여전히 ‘느끼는’ 그다. 어렸을 때는 세상 이치도 잘 모르고 주의 산만해서 착각과 환상 속에 산다. 그런데 이제 바로 보고 바로 느낀다. 그것이 시인은 도무지 서먹하고 쓸쓸하고 재미없다. 사물과 현상을 곧이곧대로 느끼는 게 영 이물스러운, 이 이상한 감각이 다 늙어서 생긴 거라고 서러워하는 시인이다. 보아하니 나라는 존재에 아랑곳없이 세상 돌아가고 세월이 흘러가누나. 도취도 상상도 멀어진 노년의 우수가 찰랑찰랑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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