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퉁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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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꽃으로 퉁칠 생각하지 마라-우리 엄마.”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7일, 아는 사람 여럿이 메일로 보내준 플래카드 내용이다. 카네이션 한 송이로 어버이날을 때우지 말라는 경고 아닌 경고다. 아낌없이 주는 ‘우리 엄마’가 실제로 그런 속내를 드러냈을까마는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한다.

문장 속 ‘퉁치다’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물건이나 일 따위를 비겨 없애다’ ‘대신하다’ ‘맞바꾸다’는 의미로 쓴다. ‘우리 이걸로 퉁치는 게 어때?’처럼 친한 사이일수록 더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이 말, 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다. 입말로는 자리 잡았지만 속어 냄새가 짙어서일 것이다.

퉁치다와 비슷한 말로 ‘에끼다’가 있다. ‘서로 주고받을 물건이나 일 따위를 비겨 없애다’는 뜻이다. 곱씹을수록 말맛이 살아나는 순우리말이지만 써 본 적도, 들어본 적도 거의 없다. 이를 ‘에우다’ ‘어끼다’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에우다는 에끼다의 경북 방언이고 어끼다는 잘못 쓴 말에 불과하다. 비슷한 뜻의 ‘엇셈하다’나 ‘삭(削)치다’도 사전에는 올라 있지만 생경하기는 마찬가지다.

말맛에 이끌려선지 요즘 입길에 자주 오르내리는 낱말이 또 있다. 웃기면서 슬프다는 뜻의 ‘웃프다’다. 웃기지만 왠지 눈물이 나는 복잡한 감정을 드러낼 때 유용하다. 그래서일까. ‘웃픈 이야기’ ‘나, 웃픈 거야!’처럼 애매한 상황에서 자주 쓰인다. 신문 제목으로도 등장할 만큼 세력을 넓혔다.

말과 글은 생물과 같아 시대 상황을 반영해 빠르게 변한다. 새로운 단어 자체도 부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이 공주처럼 예쁘고 귀하다고 착각하는 것을 일컫는 ‘공주병’은 지금 당당히 사전에 올라 있다. 반면 2006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된장녀(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를 하는 여성)와 간장녀(알뜰소비를 하는 여성)는 여전히 유행어에 머물러 있다.

‘웃프다’의 생명력은 좀더 지켜보더라도 ‘퉁치다’는 표제어로 삼는 걸 검토할 때도 됐다고 본다. 그러나 퉁치다가 표제어가 될지와 상관없이 더 중요한 게 있다. 퉁칠 만한 것끼리 퉁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속임수다. 국회의원이나 고위 관료 등이 권한과 대우에 걸맞지 않게 의무는 대충 퉁쳐버리면 곤란하다.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니까 국민들은 ‘웃프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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