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오래 간직한다는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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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이 따갑다. 오죽 따가우면 봄볕에는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보낸다는 옛말이 생겼을까. 그런 시어머니도 없건만 내 고향친구는 일조량이 풍부한 봄날에 연례행사처럼 장을 담근다. 친정엄마에게 씨간장과 항아리를 물려받은 덕분이다.

친정엄마의 씨간장은 친구가 어릴 때부터 먹어온 장맛을 그대로 전해준다고 했다. 장맛도 그러려니와 친구의 장독대에 줄지어 선 항아리 또한 친정엄마와 할머니가 쓰시던 것으로 최소한 50년 이상이 되었다. 그렇게 오래된 항아리들은 우리 엄마와 할머니 같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지만’ 질박하고 소박한 모양이 와락 정겨움으로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따가운 봄볕을 받으며 식구들이 먹을 된장과 간장을 가르던 우리의 할머니와 엄마의 모습이 거기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는 지인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고등학생의 그림이라기에는 범상치 않은 수준에도 놀랐지만 50여 년 전의 그림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사연도 감동적이었다.

“자네에게 줄 게 있어서 잠깐 들렀네. 아무래도 내가 간직하는 것보다 자네가 갖고 있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말이야.”

하루는 고교 시절 은사님이 직장으로 찾아와 두루마리 족자를 내놓으셨다. 학창 시절에는 미술반에서 활동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이 된 그분은 그동안 그림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때는 자네가 화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네. 나중에라도 혹시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면 한 장 잘 그려주게”라는 말씀을 남기고 30년간 간직해온 그분의 그림을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분은 선생님이 남기고 가신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되었지만 다시 붓을 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림을 다시 시작한 그분은 퇴직 후 새로운 삶을 즐기게 되었다며 “올해 선생님의 연세가 90을 넘으셨으니 이젠 제대로 된 그림을 선물해드릴 때”라는 말을 했다. 어린 제자의 그림을 오래 간직해온 선생님은 결국 그 제자가 늦게나마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해주었다.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변할수록 오래 기억하고 간직해주는 것은 어렵고 드문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사실 뙤약볕 내리쬐는 봄날 하루도 짧지 않은데 우리의 한평생, 얼마든지 길고 여유가 있다. 간직할 것은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도 될 만큼 말이다.

윤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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