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낡은 집이 많은 우리 동네, 한 집이 공사를 하더니 그림 같은 집으로 외양도 산뜻해진 게 보기에 좋았더라. 그 집 앞을 지나가다가 격앙된 여자의 까칠한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지금이 도대체 몇 시야, 응?!” 여자가 계단에서 내려다보는 길에 한 줄 횡렬로 서 있는 남자 중학생 넷 중 하나가 “여섯 시 사십 분요”라고 대답했다. “응, 응, 그래.” 막힌 말문을 여자는 내친 기세로 터뜨렸다. “지금이 오전이니, 오후니!? 이 시간이면 어른들이 퇴근해서 쉴 땐데 길에서 그렇게 떠들고 다니면 민폐 아니니!? 왜들 그렇게 남 생각할 줄을 모르니!?” 나는 훤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떴다. 요즘 중학생들 무섭다던데 우리 동네 아이들 착하기도 하지. 그러고 보니 웬일인지 다들 열중쉬어를 하고 있었다. 새로 이사 온 그녀는 ‘동네가 왜 이 모양이야!’ 못마땅하고 주민들을 깔보는 것 같다.
지방 하고도 도시가 아닌 시골 동네에서는 구성원 간 영향이 긴밀하다. 이사 온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새 이웃을 맞는 동네 사람들도 어느 정도 삶이 변동한다. 새 이웃이 어떤 사람들일까 기웃거리는데,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골목을 빠져나갔’단다. 싣고 온 살림이 단출한 것이다.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다는 말을 그 집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듣고 화자는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단다. 어른은 쉬쉬할지 모를 사정을 당당히 밝히는 아이도 깜찍하니 사랑스럽고, 요런 딸을 둔 ‘쫄딱 망한’ 젊은이라니! 낯선 가족에 대한 긴장이 풀리고 편히 받아들일 마음이 든 화자, 더이상 잃을 것 없이 ‘께벗고’ 들어온 새 이웃이 안쓰러우면서 담뿍 정이 간단다. ‘쫄딱’이라는 말, 속이 쑥 내려가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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